정치

“남북대화 주도는 통일부”…외교부·통일부, 같은 날 다른 대북 외교전

오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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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정책 주도권을 둘러싼 긴장과 경쟁 속에서 외교부와 통일부가 서로 다른 무대를 택해 같은 날 외교전에 나섰다. 한미 공조와 남북대화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지, 정부 내 노선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양상이다.

 

외교부는 16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미국 측과 대북정책 조율을 위한 정례 협의 첫 회의를 열었다. 회의 명칭은 한미 정상회담 조인트 팩트시트 후속 협의로 정해졌다. 과거 남북관계의 독자적 공간을 제약했다는 비판을 받은 한미 워킹그룹과의 연속선상이라는 시각을 의식해, 정상회담 후속조치라는 점을 전면에 내세운 것으로 해석된다.

이날 회의에는 한국 측 수석대표로 정연두 외교전략정보본부장이, 미국 측 수석대표로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가 참석했다. 한국 측에서는 백용진 한반도정책국장이, 미국 측에서는 댄 신트론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국 부차관보 대행과 마리아 샌드 동아태국 북한팀장이 합류하는 등 양국 외교·안보 라인이 폭넓게 배석했다. 한국 국방부와 미국 전쟁부 인원도 함께해 군사·안보 현안을 포함한 대북정책 전반이 테이블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는 이날 배포한 자료에서 “이번 회의에서는 조인트 팩트시트에 기초해 팩트시트상 한반도 관련 한미간 제반 현안이 포괄적으로 논의됐다”고 밝혔다. 이어 팩트시트에 담긴 북한 관련 합의사항을 조목조목 열거했다. 외교부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안정에 대한 의지 재확인, 2018년 싱가포르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협력, 대북 정책 관련 긴밀한 공조, 북한의 대화 복귀 및 대량살상무기·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포기 등 국제적 의무 준수 촉구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외교부는 또 “북핵 문제뿐 아니라 북한과의 대화 재개 방안 등 대북정책 전반을 논의했다”고 강조했다. 남북 대화와 교류의 외교적 레버리지를 한미 협의 틀 안에서 관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외교부는 “한미는 향후 한반도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긴밀한 공조가 중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앞으로도 각급에서 소통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다만 외교부의 이런 행보는 통일부가 밝힌 입장과 맞물리면서 부처 간 기류 차를 드러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오전 기자들과 만나 “남북대화나 교류 협력이 있을 때는 통일부가 보다 더 주도적으로,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말하며 사안별로 외교부와 통일부가 역할을 나눠야 한다는 취지를 강조했다. 외교부가 북핵과 제재·외교 공조를, 통일부가 남북대화와 교류의 직접 채널을 각각 책임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발언이다.

 

그러나 외교부는 조인트 팩트시트에 담긴 합의사항을 근거로 북핵과 제재뿐 아니라 대화 재개, 평화·안정 구상까지 포괄 논의했다고 부각했다. 통일부가 제기한 ‘남북 현안 통일부 주도’ 원칙에 대해 사실상 선을 긋는 모양새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이날 케빈 김 대사대리는 회의 직후 취재진이 “통일부와도 따로 만날 것이냐”고 물었으나 답변하지 않고 청사를 떠났다.

 

이에 맞서 통일부는 같은 날 오후 주한 외교단과 국제기구 관계자를 상대로 별도의 대북정책 설명회를 열었다. 필요시 미국과 직접 협의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내비치며 외교부·미국 간 협의에 참석하지 않은 통일부가, 다자 외교 무대를 통해 독자 메시지를 발신한 셈이다.

 

김남중 통일부 차관은 인사말에서 한반도 평화공존 구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김 차관은 “평화공존의 남북관계를 위해 더 일관되고 실천적인 화해 메시지를 내야 한다”고 말하며 북한 체제 존중, 흡수통일 배제, 적대행위 중단 등 이른바 평화공존 3원칙을 제시했다. 그는 이 원칙을 토대로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평화 조치를 지속함으로써 평화적인 남북관계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차관은 한반도 정세의 변곡점으로 내년을 지목했다. 그는 “2026년에는 북한의 9차 당대회, 미중 정상회담 등 중요 정치외교 일정이 예정된 만큼 한반도 정세가 평화로 전환되는 분수령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내년을 한반도 평화의 원년으로 만들기 위해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지를 요청했다.

 

이날 설명회에는 호주, 캐나다, 독일, 유럽연합 등 30곳 안팎의 공관·대표부에서 대사 또는 대사대리가 참석했다. 미국대사관에서는 실무자가 자리했다. 미국이 외교부와의 한미 정례협의에는 대사대리와 워싱턴 본부 인사를 전면에 내세운 반면, 통일부 설명회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급의 인력을 보낸 점이 눈에 띈다. 대북정책 조율 창구로 외교부를 무게 있게 바라보는 미국 측 인식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통일부는 이날 설명회가 외교부 주도의 한미 협의 일정과는 무관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통일부는 과거에도 연말·연초를 전후해 주한 외교단과 국제기구 관계자를 대상으로 대북·통일정책 설명회를 열어왔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정례 행사의 연장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같은 날 외교부와 통일부가 각기 다른 외교 채널을 통해 별도 메시지를 발신한 만큼, 두 부처가 사실상 대북정책 주도권을 두고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시각도 힘을 얻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한미 공조를 축으로 한 제재·억지 중심 접근과, 긴장 완화를 위한 남북 대화·교류 재개 시도를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향후 관건이 될 것으로 본다. 외교부 중심의 대북 플랫폼이 강화될수록 제재 틀은 정교해질 수 있지만, 통일부가 강조하는 유연한 접촉 공간은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병존한다.

 

정부 안에서도 대북정책 콘트롤타워를 둘러싼 논의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차원에서 부처 간 역할과 조정 메커니즘을 명확히 하지 않을 경우, 향후 남북관계 진전 국면에서 외교부·통일부 간 메시지 혼선이 반복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날 외교부와 통일부는 서로 다른 형식과 채널을 통해 대북정책 구상을 나란히 내놓았다. 정부는 한미 공조와 남북대화 사이 균형점을 찾는 동시에, 부처 간 역할 분담을 재정비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오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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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통일부#한미대북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