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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의료기기 우선심사"…식약처, 현장규제 손본다

배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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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 의료기기에 대한 규제 심사가 의료현장 수요에 맞춰 빨라지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제조와 품질관리 전 과정을 규율하는 GMP 제도를 손질하면서다. 생명 유지나 응급 수술에 사용되는 핵심 의료기기, 신개발·혁신 제품, 그리고 점자 표시로 시청각장애인의 사용을 돕는 제품을 우선심사 대상으로 묶어 공급 속도를 높이는 방향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가 필수 의료기기 공백 위험을 줄이고, 혁신 의료기기 상용화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9일 의료기기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 고시를 개정·시행한다고 밝혔다. 개정안의 핵심은 의료현장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 의료기기 등의 GMP 심사 절차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GMP는 원자재 입고부터 생산·검사·출하까지 전 주기를 관리하는 기준으로, 의료기기 품질과 안전성을 보증하는 핵심 제도다. 이번 개정으로 생명 유지 장비, 응급·수술용 기기, 신개발·혁신 의료기기 등은 GMP 심사 대기 시간을 줄여 보다 빠른 시장 진입이 가능해진다.

우선심사 대상에 포함되는 제품군의 범위 설정도 눈에 띈다. 생명유지용 인공호흡기나 심혈관 중재술 기기, 수술실에서 사용되는 필수 장비처럼 공급 차질이 환자 생명과 직결되는 품목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연구개발을 통해 새롭게 등장하는 혁신 의료기기까지 포함해, 기술 기업과 의료기기 제조사의 신제품 상용화 속도를 지원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특히 제조공정의 일부를 외부에 위탁하는 경우 제조자 간 동일 항목을 중복 심사하던 관행을 정리해, GMP 심사 부담을 줄이는 내용도 담았다.

 

기술적 측면에서 GMP 우선심사는 전체 제품 개발 타임라인을 직접 단축하는 효과를 낳는다. 의료기기 개발은 설계 검증, 임상평가, 인허가, GMP 심사 등 단계별 절차를 거치는데, 그중 GMP 심사는 생산 설비와 품질 시스템이 실제 기준을 충족하는지 확인하는 마지막 관문에 가깝다. 필수 의료기기의 경우 인허가 뒤에도 GMP 심사 병목으로 실제 공급까지 시간이 지연되는 사례가 반복돼 왔다. 필수·혁신 제품군을 선별적으로 앞당겨 심사하면, 같은 개발 기간에서도 환자에게 도달하는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번 개정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접근성 조항이 명시된 점도 주목된다. 식약처는 행정예고 기간 동안 접수된 의견을 반영해, 점자 등 시각정보를 표시한 의료기기를 GMP 우선심사 대상에 추가했다. 점자표시 의료기기는 시각장애인이나 시청각장애인이 자가혈당측정기, 복약보조기, 일부 가정용 의료기기를 스스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제품이다. 우선심사 대상에 포함되면 이러한 보조기기의 시장 출시 속도가 빨라져, 장애인의 의료 접근성을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규제 완화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다. 의료기기 제조공정을 위탁과 수탁으로 나눠 운영하는 경우, 그동안 제조자별로 GMP 심사를 중복 수행해 행정과 비용 부담이 컸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개정 고시는 위탁과 수탁 구조를 고려해 제조자 간 중복심사를 줄이는 방향으로 절차를 조정했다. 이를 통해 동일 공정에 대한 반복 점검을 줄이고, 규제 인력과 기업의 자원을 필수 분야에 재배분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국내 의료기기 산업은 인공지능 진단 보조기기, 디지털 치료제, 로봇 수술 시스템 등 고도화된 제품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혁신 의료기기의 상용화 속도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GMP 단계의 병목을 완화하는 조치는 산업 전반의 타임투마켓을 단축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미국, 유럽 등 규제기관은 혁신 의료기기나 공중보건상 필수성이 높은 제품에 대해 패스트트랙, 우선심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 이번 개정은 국제 규제 흐름과의 정합성을 맞추는 조치로도 해석된다.

 

다만 우선심사 확대가 곧바로 심사 완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확인된다. GMP는 품질관리 시스템의 적합성을 보는 만큼, 절차를 앞당기되 심사 강도는 유지하거나 일부 영역에서는 강화될 수 있다. 특히 생명유지 의료기기와 혁신 제품은 잠재적 위험이 크기 때문에, 심사 기간 단축과 안전성 확보 간 균형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우선심사 대상 선정 기준의 명확성, 우선순위 조정 과정의 투명성이 향후 제도 신뢰도를 좌우할 전망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이번 개정이 제품 개발과 생산 현장에서 체감하는 규제 환경을 조성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고 국민 보건과 안전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국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현장 수요를 반영한 합리적 제도 개선을 이어가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산업계와 의료현장은 필수 의료기기와 혁신 기기의 공급이 실제로 얼마나 빨라질지, 그리고 품질과 안전을 담보한 채 제도가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배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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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의약품안전처#의료기기우선심사#gmp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