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 혈압도 치매 위험 키운다”…국내 연구, 조기 관리 필요성 경고
정상 범위보다 약간만 높은 혈압 단계에서도 치매 위험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는 대규모 한국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특히 뇌혈관 손상과 관련된 혈관성 치매의 위험이 크게 높아져, 기존에 상대적으로 안심 구간으로 여겨지던 고혈압 전 단계부터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진은 최근 강화된 유럽 고혈압 가이드라인이 새로 도입한 상승 혈압 구간의 실제 임상 위험을 처음으로 대규모 인구 데이터를 통해 입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강조한다. 향후 고혈압 진단과 치매 예방 전략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결과로 평가된다.
이민우 한림대학교성심병원 신경과 교수와 정영희 교수, 김종욱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 교수, 한경도 숭실대학교 정보통계보험수리학과 교수, 천대영 한림대학교동탄성심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로 구성된 공동 연구팀은 국민건강보험공단 빅데이터를 활용해 혈압 수준에 따른 치매 발생 위험을 분석한 결과를 4일 발표했다. 연구에는 2009년과 2010년에 건강검진을 받은 40세 이상 성인 약 280만 명이 포함됐으며, 이들을 평균 8년 동안 추적 관찰해 치매 진단 여부를 확인했다. 국내 단일 국가 코호트로는 최대 수준의 표본이다.

연구팀은 2024년 유럽심장학회 가이드라인 기준을 적용해 참여자를 세 그룹으로 나눴다. 수축기 혈압이 120밀리미터 수은주 미만이면서 이완기 혈압이 70밀리미터 수은주 미만인 경우를 정상 혈압, 수축기 120에서 139 또는 이완기 70에서 89 범위를 상승 혈압, 수축기 140 이상이나 이완기 90 이상 혹은 고혈압 진단 또는 약물치료 중인 경우를 고혈압으로 분류했다. 고혈압 전 단계로 불리던 구간을 상승 혈압이라는 새로운 범주로 정의해 실제 위험도를 살핀 것이 핵심이다.
전체 추적 기간 동안 확인된 치매는 총 12만1223건이었고, 이 가운데 76.6퍼센트가 알츠하이머병, 12.1퍼센트가 혈관성 치매였다. 정상 혈압 그룹과 비교했을 때 상승 혈압 그룹과 고혈압 그룹에서 모두 전체 치매 발생 위험이 유의하게 증가했다. 상승 혈압 그룹의 전체 치매 위험은 정상 혈압 대비 1.6퍼센트 높았고, 고혈압 그룹에서는 2.9퍼센트 증가했다. 수치 자체는 크지 않아 보이지만, 수백만 명 규모의 인구집단에서 나타나는 상대 위험 증가라는 점에서 공중보건 차원의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특히 혈관 손상으로 인한 혈관성 치매에서는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다. 정상 혈압에 비해 상승 혈압 단계에서 혈관성 치매 위험은 16퍼센트 높았고, 고혈압에서는 37퍼센트 증가했다. 혈압 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혈관성 치매 위험이 단계적으로 커지는 뚜렷한 경향이 관찰된 것이다. 연구진은 비교적 젊고 자각 증상이 없는 상태에서 방치되는 약간 높은 혈압이 향후 뇌혈관 손상 축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연령별 분석에서는 40세에서 64세 사이 중년층에서 혈압에 따른 치매 위험 증가가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 이 연령대에서 상승 혈압 그룹의 전체 치매 위험은 정상 혈압보다 8.5퍼센트 높았다. 고혈압 그룹에서는 치매 위험이 무려 33.8퍼센트 증가했다. 젊을수록 혈압 상승의 기간이 길어지고, 누적된 혈관 손상이 뇌기능 저하로 이어질 여지가 크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결과로 해석된다.
성별에 따라서는 여성에서 혈압 상승과 치매 위험의 연관성이 더 강하게 관찰됐다. 여성의 경우 상승 혈압과 고혈압 모두에서 치매 위험 증가가 통계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 반면, 남성에서는 고혈압 단계에서만 유의한 연관성이 있었다. 여성은 폐경 전후 호르몬 변화와 혈관 기능 저하가 겹치면서 상대적인 취약성이 커질 수 있다는 기존 연구 흐름과도 맞물린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번 연구는 고혈압이 단지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같은 심혈관질환 위험 인자에 그치지 않고, 치매 특히 혈관성 치매와 알츠하이머병 위험에도 직결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동시에 유럽심장학회가 2024년 가이드라인에서 새로 도입한 상승 혈압 개념이 실제로 치매 위험을 구별하는 지표로 유효하다는 것을 뒷받침한 첫 대규모 자료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존에는 고혈압 진단 기준에 못 미치는 구간의 뇌 건강 영향에 대한 근거가 부족했다.
연구를 이끈 이민우 교수는 상승 혈압 단계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수축기 혈압이 120을 넘거나 이완기 혈압이 70을 넘는 경우, 아직 고혈압 진단을 받지 않았더라도 뇌혈관 건강을 위해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40대에서 60대 중년층과 여성은 혈압 수치가 정상 상한선을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치매 예방을 위한 조기 경고 신호로 받아들이고 체중 조절, 염분 섭취 감소, 규칙적인 운동, 금연과 절주 등 생활 습관 교정에 서둘러 나설 것을 조언했다.
국제 가이드라인 측면에서도 파급 효과가 예상된다. 유럽심장학회는 최근 연구들을 바탕으로 기존 고혈압 전 단계를 독립적인 관리 대상인 상승 혈압으로 재정의하고, 이 단계에서부터 식이 요법과 운동 등 비약물적 개입을 권고하고 있다. 이번 한국 코호트 분석은 이러한 기준 변화가 뇌혈관성 치매 위험 관리에도 타당하다는 근거를 추가한 셈이다. 향후 미국 등 다른 지역의 가이드라인에서도 유사한 범주 세분화와 조기 개입 논의가 힘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연구는 관찰 연구라는 특성상 혈압과 치매 사이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단정하기보다는 연관성을 보여주는 수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한계도 있다. 유전 요인, 식습관, 교육 수준, 수면 장애 등 다양한 치매 위험 요인 가운데 혈압의 기여도를 정밀하게 분리해내기 위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병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명 규모 장기 추적 자료에서 일관된 경향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는 평가가 많다.
이번 연구 결과는 유럽심장학회 공식 학술지인 유럽심장저널 최신호에 혈압 범주에 따른 치매 위험을 분석한 대한민국 전국민 연구로 게재됐다. 이 저널은 미국심장협회 학술지와 미국심장학회지와 함께 세계 3대 심혈관 임상 저널로 꼽힌다. 산업계와 의료계에서는 상승 혈압 단계 관리 강화가 향후 디지털 혈압 측정기, 원격 모니터링, 생활 습관 개선 프로그램 등 예방 중심의 헬스케어 시장 확대를 자극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의료 현장과 보건 정책에서 고혈압 전 단계 관리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둘지 논의가 본격화될 가능성도 있다.
연구진은 앞으로 혈압 변화 패턴과 치매 아형별 위험을 더욱 정교하게 분석하고, 유전체와 생활 습관 데이터를 연계해 개인별 맞춤 예방 전략을 제시하는 후속 연구를 준비 중이다. 산업계와 정책 당국, 의료 현장은 상승 혈압 단계부터 시작되는 조기 개입 전략이 실제로 치매 부담을 줄일 수 있을지 주의 깊게 살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