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도 계약 취소 사유”…법무부, 67년 만에 민법 계약법 전면 손질
정치적 충돌 지점과 개정 압박 속에서 법무부가 움직였다. 제정 67년이 지난 민법 계약 규정을 둘러싼 낡은 틀을 두고, 국민 생활과 밀접한 계약 관계를 현대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다시 정국의 전면으로 떠올랐다.
법무부는 16일 민법 중 계약법 규정에 대한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1958년 민법 제정 이후 계약 분야를 대상으로 한 첫 전면 개정 작업이 본격 궤도에 오른 셈이다. 앞서 친족법과 상속법은 여러 차례 손질됐지만, 총칙·물권·채권 등 재산 관계 핵심 영역은 그동안 큰 변화 없이 유지돼 왔다.

개정안은 경제 환경 변화를 반영해 법정이율 체계를 바꾸는 내용을 담았다. 현재 민사 연 5퍼센트, 상사 연 6퍼센트로 고정된 법정이율을 금리와 물가 등 경제 사정을 고려해 대통령령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법정형 변동이율제를 도입했다. 법무부는 급변하는 금융 환경 속에서 고정 이율 체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을 수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최근 사회 문제로 부각된 가스라이팅 개념을 민법에 반영했다. 개정안은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강하게 의존한 상태에서 부당한 간섭을 받았을 때, 그 영향 아래 한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도록 했다. 종교 지도자와 신도, 간병인과 환자 등 권력 관계가 비대칭적인 영역에서 심리적 지배가 문제로 떠올랐지만, 기존 착오·사기·강박 규정만으로는 보호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법무부는 미국과 영국 등 다수 국가에서 채택한 부당위압 법리를 참고해, 부당한 간섭에 의한 의사표시 취소를 명시적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가스라이팅 등 심리적 압박에 따른 계약이나 의사표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사법적 구제가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계약 관계의 지속 가능성을 둘러싼 규정도 대폭 정비됐다. 그동안 판례를 통해 인정돼 온 사정 변경에 따른 계약 해제·해지 법리를 법 조문에 명문화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계약수정청구권을 도입했다. 개정안은 계약 수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당사자에게 계약 유지를 전제로 한 수정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계약 해제·해지를 허용하도록 했다.
채무불이행과 손해배상 규정도 손질됐다. 손해배상의 방법과 관련해 금전배상뿐 아니라 원상회복에 의한 배상을 일반 원칙으로 인정했다. 금전채무 불이행 시 손해배상 규정과 위약금 관련 조항도 보완해 실제 손해에 상응하는 합리적 배상 구조를 갖추는 데 초점을 맞췄다.
매매 담보책임 규정은 구조 자체가 단순화됐다. 지금까지 유형별로 세분돼 복잡하고 불명확하다고 지적받던 담보책임 체계를 정리해, 매매 하자를 권리의 하자와 물건의 하자 두 가지로 통합했다. 그와 함께 종전에는 일부 하자 유형에만 인정되던 추완이행 청구권과 대금감액 청구권을 모든 하자 유형에 확대해 구제 수단을 강화했다. 법무부는 이로써 국민이 권리를 보다 편리하게 행사하고 법률 분쟁을 합리적·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법은 1958년 제정된 이후 성년후견 제도 도입 등 부분 개정은 있었지만, 조문 전반을 대상으로 한 전면 개정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친 전면 개정 시도가 있었으나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한 바 있다.
법무부는 2023년 6월 양창수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법무부 민법개정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전면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형식적으로는 총칙, 물권편, 채권편 등 편별 구분으로 구성된 현행 체계를, 기능적 관련성을 기준으로 분야별로 나눠 단계적으로 손보겠다는 구상이다.
첫 번째 과제로 국민 생활과 밀접한 계약법 규정이 선택됐다. 법무부는 이번에 국무회의를 통과한 계약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이후 다른 분야로 개정 논의를 확장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계약과 관련된 민법 규정 전반이 전면 개정의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개정안의 의미를 국민 편익과 신뢰 회복에 뒀다. 정 장관은 “개정안이 국민 편익과 민법의 신뢰성을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며 “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앞으로도 민법의 현대화를 위한 개정 작업을 지속해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무회의 통과로 계약법 개정안이 국회 심사 단계로 넘어간 만큼, 여야가 개정 방향과 세부 조문을 둘러싸고 어느 수준의 공감대를 형성할지에 따라 입법 속도가 결정될 전망이다. 국회는 법무부가 제출하는 개정안을 토대로 상임위원회 심사와 법제사법위원회 논의를 거쳐 본회의 표결 절차에 들어갈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