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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없으면 AI도 없다”…의료AI, 학습경쟁 가열

전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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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인공지능이 환자 진단과 신약개발 전 과정을 바꾸고 있다. 병원에서 쌓인 영상·유전체·임상기록을 AI가 대규모로 학습하면서 진단 정확도와 예후 예측력이 높아지고, 제약사는 이를 이용해 후보물질 발굴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업계는 방대한 의료데이터를 누가 어떻게 확보·활용하느냐가 향후 의료·제약 주도권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본다. 한편 개인정보 보호와 알고리즘 책임 문제를 둘러싼 규제 논쟁도 본격화돼 기술 상용화의 속도를 가늠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국내외에서는 특정 질환에 특화된 의료 AI 솔루션과 정밀의료 플랫폼이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영상판독 보조, 병리 슬라이드 자동 분석, 암 환자를 위한 맞춤 항암제 추천 등 기능이 대표적이다. 다수 솔루션은 의료기기 소프트웨어로 인허가를 받고 실제 병원 현장에 도입되는 단계에 들어섰다. 제약 분야에서는 화합물 구조를 생성하고 독성을 예측하는 생성형 AI 모델이 도입되며, 전통적인 신약개발 과정의 일부를 대체하거나 병행하는 방식으로 활용 폭이 넓어지고 있다.

기술의 핵심은 다층적인 의료데이터를 동시에 학습하는 멀티모달 AI다. 영상, 유전체, 전자의무기록, 웨어러블에서 수집한 생체신호 등 이질적인 데이터를 통합해 질환 패턴과 치료 반응을 예측하는 구조다. 예를 들어 유방암 영상 데이터를 학습한 AI는 기존 인력 단독 판독 대비 조기 병변 발견률을 높이거나 불필요한 추가검사 비율을 줄이는 성과를 내고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특정 암 환자의 치료 반응 예측 정확도가 기존 통계 모형 대비 유의미하게 개선된 결과도 보고됐다.

 

특히 이번 의료 AI 기술 확산은 기존 방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기존에는 의사와 연구자가 제한된 데이터에서 통계 분석을 수행했다면, 이제는 수만 건 이상 대규모 데이터를 기반으로 숨겨진 상관관계를 찾고 있다. 유전체 분석과 영상 정보를 동시에 고려해 환자 집단을 세분화하고, 같은 병명 아래서도 약이 잘 듣는 환자군과 그렇지 않은 환자군을 미리 나누는 식이다. 업계에서는 약효 예측 정확도가 높아질수록 임상시험 실패 위험이 줄고 개발비를 줄일 수 있다고 평가한다.

 

시장성도 커지고 있다.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로 의료비 부담이 커지면서, 조기 진단과 맞춤 치료를 통해 비용을 줄이려는 수요가 강해지고 있다. 국내 주요 병원은 AI 영상판독 솔루션을 적용해 야간·휴일 판독 공백을 메우고, 중증 의심 환자를 자동 분류해 응급 상황 대응 속도를 높이고 있다. 환자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검사와 재입원 가능성을 줄이고, 의료진은 반복 업무 부담을 줄여 복잡한 의사결정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제약과 바이오 기업들도 AI 기반 신약개발 플랫폼을 전략 핵심으로 삼는 분위기다. 후보물질 탐색 단계에서 수십억 개의 가상 화합물을 시뮬레이션해 합성 가능성과 표적 단백질 결합력을 예측하고, 독성 위험이 큰 구조는 사전에 걸러낸다. 일부 글로벌 기업은 AI가 추천한 후보물질이 전임상을 통과해 임상 단계로 진입한 사례를 쌓아가고 있다. 아직은 전통적 방식 대비 일괄적으로 기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말하기 어렵지만, 후보물질 발굴과 설계 최적화 단계에서 인력·시간 절감 효과가 점차 입증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글로벌 경쟁도 치열하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형 병원, 기술기업, 클라우드 사업자가 연합해 수백만 명 규모의 비식별 의료데이터를 학습한 대형 의료 특화 모델을 발표하고 있다. 유전체 기반 정밀의료에서도 미국 국립보건원과 영국 공공의료 시스템이 국가 단위 유전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희귀질환 진단과 암 정밀치료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중국과 일본 역시 자국 병원 데이터를 이용한 AI 진단 솔루션 상용화에 속도를 내면서 의료 AI의 기술·데이터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된 상황이다.

 

국내에서는 데이터 활용을 둘러싼 규제와 사회적 논의가 병행되고 있다. 의료데이터는 민감정보로 분류돼 활용 과정에서 엄격한 보호 조치가 요구되며, 가명처리와 안전한 연구 환경 구축이 필수로 여겨진다. 식품의약품 관련 당국은 AI 기반 의료기기 심사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알고리즘 성능 검증과 업데이트 기준을 제시하고 있고, 개인정보보호 관련 기관은 의료데이터 결합과 해외 이전에 대해 별도 심사 체계를 운용하고 있다. 업계는 명확한 기준이 투자 확대와 글로벌 협력의 전제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AI 책임성과 윤리 문제를 둘러싼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진단 보조 AI의 오판으로 인한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의료진, 병원, 개발사 중 누구에게 어느 비율로 물을지에 대한 법적 기준이 아직 정교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다. 유전체 기반 예측검사 확산에 따른 차별·낙인 우려, 학습데이터 편향으로 특정 인종·성별 집단에 불리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이에 따라 알고리즘 설명 가능성을 높이고, 공정성 검증을 위한 별도 평가 체계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늘어나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의료 AI와 정밀의료 기술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데이터 거버넌스와 제도 설계가 산업 성장의 관건이 되고 있다고 본다. 기술 측면에서는 고성능 연산 자원과 대규모 학습데이터를 보유한 글로벌 빅테크와 의료 특화 스타트업의 협력이 강화될 가능성도 있다. 동시에 각국 정부가 자국 내 의료데이터를 전략 자산으로 보호하려는 정책을 확대하면서, 국경 간 데이터 이동과 공동연구 구조가 변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산업계는 의료 AI가 실제 의료현장과 제약개발 과정에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전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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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ai#정밀의료#학습데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