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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공정을 설계한다”…국내 제약 스마트 공장 본격 확산

오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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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품 제조 공정의 디지털 전환이 제약바이오 산업의 새로운 경쟁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로봇 기술을 결합한 스마트 공장 구축이 신약개발과 연구개발 투자를 뒷받침하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는 흐름이다. 업계는 품질과 생산성, 규제 대응력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제조 혁신을 누가 먼저 완성하느냐가 글로벌 시장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8일 발간한 정책보고서는 의약품 산업에서 디지털 제조혁신이 선택이 아닌 필수 단계로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가 말하는 디지털 제조혁신은 생산 라인 일부의 자동화를 넘어, 공정 설계와 실행, 품질관리, 물류까지 전 과정을 데이터 기반으로 통합하는 총체적 변화를 가리킨다.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통해 공정 패턴을 학습하고, 인공지능이 최적의 운전 조건을 제시하는 형태의 공정 자동화가 대표 사례다.

핵심 개념인 스마트 팩토리는 제품 기획부터 생산, 유통까지 흐르는 모든 정보를 ICT 기술로 연결해 최소 비용과 시간으로 맞춤형 제품을 생산하는 지능형 공장을 의미한다. 제약 분야에서는 각 제조 설비에 부착된 센서에서 온도, 압력, 유량 등 수백 개 이상의 변수 데이터를 초 단위로 수집해 클라우드나 데이터 레이크에 저장한다. 이후 AI 기반 공정 최적화 솔루션이 이 데이터를 분석해 목표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원료 사용량과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조합을 도출한다. 기존 사람이 경험과 규정을 토대로 설정하던 조건보다 변동성을 줄이고 수율을 안정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평가다.

 

머신 비전 기술 도입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머신 비전은 카메라와 이미지 분석 알고리즘으로 정제, 충전, 포장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미세 이물, 용기 외관 이상, 라벨 인쇄 오류 등을 사람의 눈보다 높은 정밀도로 실시간 검출하는 기술이다. 제약처럼 무결점에 가까운 품질이 요구되는 산업에서 불량을 조기에 감지해 전체 배치 폐기 위험을 줄이는 수단으로 활용 폭이 넓어지고 있다.

 

다만 보고서는 국내 제약기업들의 디지털 전환 수준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스마트제조혁신추진단 평가 결과를 보면 국내 스마트 공장 가운데 71.4퍼센트 이상이 기본적인 자동화와 부분 데이터 수집 수준인 레벨 1에서 2로 분류됐다. 공정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통합되고, AI를 활용한 예측 제어가 이뤄지는 고도화 단계에 도달한 공장은 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약 특유의 규제 환경과 품질 기준으로 인해 실험적 시도가 어렵고, 디지털 인력 확보와 설비 투자 부담이 크다는 점이 걸림돌로 꼽힌다.

 

대웅제약은 이 같은 한계를 앞서 돌파한 사례로 언급된다. 대웅제약은 2017년 충북 오송에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해 현재 스마트 공장 레벨 4 수준에 도달했다. 레벨 4는 대부분의 공정 데이터가 통합 관리되고, 핵심 공정에 대한 최적화와 예측 기반 운영이 가능한 단계로 평가된다. 보고서는 대웅제약 오송 공장이 국내 제약산업에서 가장 앞선 스마트 공장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분석했다. 특히 배치형 생산이 일반적인 제약 제조에서 연속제조공정 적용 범위를 넓히고, 이를 디지털 플랫폼과 연동해 실시간 품질관리 체계를 만든 점을 차별점으로 꼽았다.

 

종근당은 천안공장을 전면적인 디지털 전환의 시험대이자 AI 전환 거점으로 삼고 있다. 천안공장은 단일 제약 생산시설 기준 아시아 최대 규모 중 하나로, 연간 약 9000억원 규모의 의약품을 생산한다. 종근당은 대규모 생산시설의 복잡한 공정과 설비를 표준화하고, 품질 일관성 확보와 글로벌 규제 대응, 생산원가 절감, 설비 가동률 향상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2023년부터 단계별 스마트 공장 구축 로드맵을 실행 중이다.

 

현재 천안공장에는 공장 전역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통합 관리하는 인프라가 먼저 깔렸다. 이를 바탕으로 실제 설비와 똑같은 디지털 복제본을 구축하는 디지털 트윈과 가상 협업·훈련에 활용되는 메타버스 플랫폼이 결합된 구조가 마련됐다. 여기에 공정 데이터와 품질 이력을 학습한 인공지능이 향후 배치 결과를 예측하고 이상 징후를 사전에 감지하는 예측적 품질관리 플랫폼도 구축을 마쳤다. 과거에는 시험 배치 이후에야 알 수 있던 품질 문제를 설비 운전 단계에서 미리 예측해 조치할 수 있는 기반이 생긴 셈이다.

 

종근당은 다음 단계로 지능형 관제시스템과 제약·바이오 특화 SLM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SLM은 설계에서 생산, 변경관리까지 전 주기 데이터를 통합해 의약품 수명주기를 관리하는 소프트웨어 개념으로, 여기에 사람과 AI가 함께 의사결정을 내리는 협업 에이전트 플랫폼을 더해 공정 변경이나 설비 증설 시 규제 영향과 품질 변동을 동시에 시뮬레이션하는 구상을 그리고 있다. 회사는 이와 병행해 데이터 거버넌스를 고도화하고, AI 모델 검증 체계를 연구개발 단계뿐 아니라 GMP 생산 환경에서도 적용하는 작업, 디지털 역량을 갖춘 인력 양성 과제를 꾸준히 진행할 계획이다.

 

변형원 종근당 전무는 이러한 전략을 품질 안정성, 원가 경쟁력, 글로벌 규제 대응력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기반 구축으로 설명했다. 제조 공정 데이터를 일관된 기준으로 관리하고, AI가 제안하는 최적 조건을 규제 문서와 바로 연동할 수 있어야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시장의 품질 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 CDMO 산업 특성에 맞춘 제조실행시스템 MES 고도화를 핵심 축으로 삼고 있다. MES는 생산 현장의 작업 지시, 자재 관리, 공정 기록, 품질 데이터 등을 전자적으로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제약 분야에서는 전자 배치 기록과 실시간 추적성을 확보하는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종이 기반 기록과 수기 입력에 따른 비효율과 오류를 줄이고, 전체 공정 흐름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 품질 이슈 발생 시 즉각 원인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기본적인 전산화를 넘어 공정을 세밀하게 분석해 CDMO 맞춤형 MES 1.0을 설계했다. 다양한 글로벌 제약사로부터 서로 다른 공정과 품질 기준을 위탁받는 특성상 다품종 소량 생산이 잦은데, 이를 IT 인력의 개입 없이도 현장 작업자가 직관적으로 설정하고 운용할 수 있도록 설계 구조를 단순화한 것이 특징이다. 동시에 각 고객사의 규제 요구사항을 시스템 수준에서 분기 처리해 공정 변경과 문서화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회사는 5공장에 적용한 MES 1.0을 기반으로 MES 2.0 개발에 착수했다. 목표는 그동안 수동으로 남겨졌던 기록과 설비 외 영역까지 자동화 범위를 확장하고, 작업자 중심 생산 체계를 시스템 중심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다. 장비와 물류 자동화 시스템과 MES를 긴밀히 연동해 투입부터 출하까지 흐르는 모든 데이터를 한 축에서 관리하면 배치별 품질 편차를 줄이는 데 더 유리해진다. 삼성바이오로직스 MES그룹을 이끄는 유승진 그룹장은 제조 설비 및 물류 자동화 통합에 따른 효율성뿐 아니라, 이러한 통합이 품질 향상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MES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며 바이오의약품 제조 디지털화가 궁극적으로 환자 안전과 치료 접근성에 대한 투자라고 풀이했다.

 

글로벌 제약사와 비교하면 국내 기업들의 디지털 전환 속도는 아직 차이가 있는 편으로 보인다. 다국적 빅파마들은 이미 주요 생산 거점에 연속제조공정을 도입하고, 공정 중 실시간 품질 모니터링 시스템을 적용해 규제기관으로부터 사전 승인 루트를 확보하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과 유럽 규제기관도 공정 데이터 기반 품질보증 QbD와 PAT 도입을 장려하는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며 디지털 제조 혁신을 간접적으로 유인하는 양상이다. 국내 기업이 이 격차를 좁히려면 설비 투자뿐 아니라 데이터 표준화, 규제 친화적 시스템 설계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는다.

 

정책 측면에서는 스마트 공장 보급 사업과 데이터 인프라 구축 지원 등 정부 차원의 지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제약 특화 디지털 제조 기술에 대한 별도 가이드라인과 인허가 프로세스 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AI가 제안한 공정 조건과 디지털 트윈 시뮬레이션 결과를 어느 수준까지 품질 문서와 규제 심사에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져야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디지털 전환에 나설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제약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디지털 전환이 단기적으로는 설비 투자와 조직 변화 비용을 수반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수탁 생산 시장에서 차별화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특히 바이오의약품과 첨단 치료제처럼 공정 복잡도가 높은 제품이 늘어날수록 AI 기반 공정 최적화와 스마트 공장 역량의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 산업계는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추진 중인 제조 디지털 혁신이 실제 상용 공장 전반으로 확산돼 글로벌 수준의 품질·비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주목하고 있다.

오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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