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호르몬이 뇌 기억까지 조절 IBS, 신경과학 새 프레임 제시
성장호르몬이 더 이상 키 성장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국내 연구진이 성장호르몬이 뇌 해마에서 기억 형성 초기 단계에 빠르게 생성되며, 특정 경험을 저장하는 기억저장 세포의 성숙을 직접 조절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학습 직후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이 호르몬 의존적 단백질 합성이 이뤄져야 기억이 안정적으로 저장되고 이후에 떠올릴 수 있다는 의미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성장호르몬을 매개로 한 새로운 인지 기능 조절 전략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초과학연구원 IBS 기억및교세포연구단 강봉균 단장 연구팀은 특정 경험을 학습하는 순간과 그 직후, 뇌의 기억 중추로 알려진 해마의 신경세포에서 성장호르몬이 빠르게 생성되고 농도가 급증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20일 밝혔다. 연구는 생쥐 모델을 활용해 학습 직후 시간대별 단백질 합성과 신경 회로 변화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수행됐으며, 결과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벤시스에 같은 날 온라인 게재됐다.

연구의 핵심은 기억을 저장하는 실체로 알려진 기억저장 세포에 성장호르몬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규명한 부분이다. 기억저장 세포는 특정 경험을 할 때 국소적으로 활성화되는 일부 신경세포 집단으로, 여기에 기억의 내용이 장기적으로 보존된다. 기억이 실제로 형성되려면 이 세포들의 구조와 기능이 변하는 성숙 과정이 필수적인데, 그 시점과 분자적 조절 기전은 그동안 명확히 설명되지 못했다.
IBS 연구진은 생쥐에게 특정 환경을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하도록 학습시키는 행동실험을 설계했다. 이후 학습 시점을 기준으로 단백질 합성을 억제하는 약물을 서로 다른 시간대에 투여했다. 학습 직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만 단백질 합성을 차단했을 때는 생쥐가 같은 환경에 다시 노출됐을 때 공포 반응을 보이는 등 기억 회상 능력이 유지됐다. 반면 학습이 이뤄지는 바로 그 순간을 포함한 초기 단계에서 단백질 합성을 막자 기억 회상 능력이 크게 감소했다.
해마에서 활성화된 기억저장 세포를 분자생물학적 방법으로 표지해 분석한 결과도 이를 뒷받침했다. 보통 기억이 형성될 때는 신경세포 간 연결 강도가 증가하는 시냅스 가소성 변화가 관찰되지만, 학습 초기 단백질 합성이 차단된 조건에서는 이러한 시냅스 강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기억 형성에 필수적인 단백질들이 학습과 그 직후 매우 이른 시점에 빠르게 합성돼야 하며, 이 짧은 시간 동안의 분자적 변화가 기억저장 세포 성숙과 이후 기억 유지 및 회상을 좌우한다고 해석했다.
연구진은 다음 단계로 이 초기 단백질들 가운데 어떤 인자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탐색했다. 프로테오믹스와 면역염색 분석 결과 학습 직후 해마에서 성장호르몬이 빠르게 증가하는 현상이 발견됐다. 특히 성장호르몬은 해마 전체가 아니라 학습 때 실제로 활성화된 기억저장 세포에서 선택적으로 높게 발현됐다. 즉, 특정 경험을 부호화하는 세포 집단 내부에서 성장호르몬 의존적 신호가 국소적으로 켜지는 셈이다.
성장호르몬이 단순 동반 현상이 아니라 기억 형성의 원인 인자인지 검증하기 위해 연구진은 성장호르몬 신호전달을 방해하는 변이 호르몬을 제작해 해마 신경세포에 발현시켰다. 이 변이체는 성장호르몬 수용체에는 결합하지만 정상적인 신호를 전달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형태다. 그 결과 성장호르몬 경로가 막힌 상태에서는 앞서 단백질 합성을 전반적으로 억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억저장 세포에서 시냅스 강화가 나타나지 않았고, 생쥐의 기억 회상 행동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반대로 단백질 합성을 억제해 기억 형성이 저해된 상황에서 성장호르몬을 추가로 공급했을 때는 결과가 달라졌다. 저해된 조건에서도 성장호르몬을 보충하자 기억저장 세포의 구조적 변화와 전기생리학적 기능 변화가 일부 회복됐고, 생쥐가 학습했던 환경을 다시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해 떠올리는 행동 역시 상당 부분 되살아났다. 연구진은 이러한 결과를 근거로 성장호르몬이 해마에서 기억 형성과정을 직접 조절하는 핵심 분자 인자로 작동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동안 기억 연구는 글루탐산 등 신경전달물질과 시냅스 장기강화 현상에 집중돼 있었다. 성장호르몬은 뇌하수체에서 분비돼 전신의 키와 근육, 장기 발달을 촉진하는 내분비 호르몬으로 주로 이해돼 왔다. 이번 결과는 동일한 성장호르몬이 뇌 내부 국소 회로에서 자가생성돼 기억저장 세포의 성숙을 미세하게 조절한다는 점을 보여주며, 내분비 호르몬과 뇌 기능의 경계를 다시 그리게 하는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인지 기능 조절 측면에서 보면 성장호르몬은 신약 타깃 후보로서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성장호르몬 자체를 전신적으로 증강하는 접근은 부작용 우려가 크지만, 해마 특정 회로에서 성장호르몬 신호를 조절하는 방식은 노화나 외상, 퇴행성 뇌질환에서 손상된 기억 회로를 복원하는 전략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특히 기억 형성의 ‘결정적 창’을 학습 직후 초기 시간대로 특정했다는 점은, 이 시기를 겨냥한 시간 의존적 치료나 디지털 중재와 결합한 복합 치료 설계에도 활용될 수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뇌 내 호르몬과 인지 기능의 관계를 다루는 연구는 꾸준히 증가해 왔다. 해외에서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과 공포 기억, 성호르몬과 사회적 행동 사이의 연관성이 보고돼 왔지만, 성장호르몬을 기억저장 세포 수준의 구조적 성숙과 직접 연결한 사례는 드물었다. IBS 연구는 학습 후 수 분에서 수 시간 이내에 작동하는 호르몬 의존 분자 기전을 세포 단위로 추적했다는 점에서 기존 행동수준 연구에 비해 정밀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당장 임상 적용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성장호르몬은 전신 대사를 폭넓게 조절하는 만큼 약물 형태로 장기간 투여할 경우 종양 발생 위험, 대사 이상 등 부작용 가능성이 있다. 뇌 내 특정 회로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도록 표적화하는 전달 기술과 용량 조절 전략이 확보돼야 한다. 또 기억을 인위적으로 강화하거나 조작하는 개입이 윤리적 논쟁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규제와 사회적 합의 논의도 병행될 필요가 있다.
강봉균 단장은 성장호르몬과 기억 연구의 의미를 신경과학 패러다임의 확장으로 설명했다. 그는 신체 성장 조절인자로만 여겨졌던 성장호르몬이 기억저장 세포의 기능적 변화를 직접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성장호르몬과 같은 내분비 인자가 뇌 회로의 미세 조절자라는 관점이 앞으로 기억 연구의 새로운 틀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산업계와 학계는 이번 결과가 장기적으로 인지질환 치료와 뇌 기능 증강 기술 개발로 이어질지 여부를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