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이 R&D 방향 제안한다”…정부, 2027 투자전략에 반영 시동
국가연구개발 투자의 방향성을 민간이 선제적으로 제안하는 구조가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정부가 탄소중립, 첨단바이오, 우주항공 등 미래 산업을 중심으로 200여개 기업의 최고기술책임자와 만나 기술 수요와 정책 개선 요구를 들으며 2027년 국가 R&D 투자전략을 세우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국가 연구개발 예산의 80%를 집행하는 민간과의 공조를 강화해 기술패권 경쟁과 산업 구조 전환에 대응하겠다는 구상으로, 업계에서는 향후 민관 공동 기획이 R&D 생태계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4일 서울 피스앤파크 컨벤션에서 박인규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주재한 2025 민·관 R&D 혁신포럼을 열고 민간의 정부 연구개발 기술수요와 주요 정책 개선 의견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이번 포럼은 2027년도 국가연구개발 투자방향 수립에 앞서 산업계의 중장기 기술 전략을 체계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사전 논의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포럼에는 고서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상임 부회장을 비롯해 탄소중립, 무탄소에너지, 첨단바이오, 미래모빌리티, 디지털전환, 우주항공 등 6개 미래산업 분야에서 활동하는 200여개 기업의 CTO 등이 참여했다. 분야별 민간 전문가들이 직접 기술 수요를 제시하고, 대규모 실증 인프라 구축, 규제·표준 정비, 인재 양성 체계 개선 등 제도적 과제까지 함께 논의하는 구조다.
과기정통부는 2021년부터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와 함께 산업별 민간R&D협의체를 운영하며 민관 협력을 상시화하고 있다. 기존에도 기업들이 국가적 이슈와 연계된 정부 회의체에 참여해 왔지만, 민간R&D협의체는 정부 주도의 단발성 회의가 아니라 업계가 주도하는 상시 네트워크라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문제 제기와 수요 발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속 사업 기획과 예산 반영까지 연결되는 구조를 지향하는 셈이다.
정부는 민간R&D협의체를 통해 접수된 기술 수요를 신규 연구개발 사업으로 연계하며 실질적인 예산 반영을 늘려가고 있다. 민간이 제안한 기술 수요가 정부 R&D 예산에 반영된 규모는 2022년 529억5000만원 수준에서 2026년 2142억원으로 약 4배 확대됐다. 첨단바이오와 디지털전환 등 빠르게 시장이 변하는 분야일수록 민간이 파악한 기술 간극을 정부가 보완하는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날 발표된 분야별 전략보고서에는 각 산업별 민간R&D협의체가 발굴한 핵심 기술수요와 함께 정책·제도 개선 과제가 담겼다. 탄소중립과 무탄소에너지 분야에서는 대규모 실증 설비와 장기 프로젝트를 뒷받침할 투자 프레임워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첨단바이오와 디지털전환 분야에서는 신기술의 상용화를 가로막는 인증·인허가 절차를 합리화하고, 데이터 활용과 보안 규율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다. 미래모빌리티와 우주항공 분야에서는 글로벌 기술표준 경쟁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표준화 전략과 인재 양성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담겼다.
전략보고서는 실증 인프라와 설비투자 지원 확대, 산업별 기술표준과 인증제도 마련, 도메인 특화 인력 양성 프로그램 등 공통 현안을 폭넓게 다뤘다. 특히 첨단바이오와 디지털 전환 분야에서는 병원, 제약사, IT 기업이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공동 데이터 플랫폼과 테스트베드가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됐다. 디지털 헬스케어와 정밀의료 분야의 경우 의료 데이터 활용 규제,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인허가, 보험 적용 기준 등이 R&D 방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어 민관 간 긴밀한 조율이 요구된다는 시각도 반영됐다.
과학기술혁신본부는 이날 포럼에서 공개된 전략보고서 내용을 과기정통부를 비롯해 복지부, 국토부, 중기부, 식약처, 우주청 등 국가연구개발사업 주관 부처에 전달할 예정이다. 각 부처는 이를 2027년도 국가연구개발 투자방향과 예산 배분·조정 과정에 참고 자료로 활용하게 된다. 탄소중립, 첨단바이오, 우주항공과 같은 장기 과제에서 부처 간 중복투자를 줄이고, 투자 간극을 메우는 조정 기능도 함께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고서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상임 부회장은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정부 정책 의지와 산업계 혁신 역량을 결집해 국가 기술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산업별 민간R&D협의체가 민관 연구개발 협력의 실질적인 거버넌스로 발전할 수 있도록 협회 차원의 지원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이 거버넌스가 안착할 경우, 기업의 중장기 기술 로드맵과 국가 R&D 전략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효과가 기대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인규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구조적 체질 개선과 혁신을 기반으로 한 성장 달성을 위해 정부와 민간의 협력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박 본부장은 정부가 민간과 시장에서 투자하기 어려운 기초·원천연구와 차세대 기술 육성에 역량을 집중하는 동시에, 민간 투자에 마중물을 제공해 민관 연구개발 투자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탄소중립, 첨단바이오, 우주항공 등 국가 전략기술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정부 연구개발 투자가 민간의 실제 수요와 얼마나 정교하게 맞물릴지가 향후 경쟁력의 성패를 가를 관전 포인트로 떠오르고 있다. 산업계는 이번 민관 협력 체계가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 예산 구조와 제도 개편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