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품 줄이고 거래 끊고”…홈플러스 경영 악화가 불러온 ‘유통쇼크’
홈플러스의 경영 악화가 가시화되면서 일부 협력사가 상품 공급을 중단하거나 물량을 줄이는 등 유통업계 전반으로 불안이 확산하고 있다. 이미 납품한 물품 대금 정산이 지연되는 데다 매장 방문 고객까지 감소하면서, 협력업체들이 채권 회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어적 납품’에 나선 양상이다.
8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삼양식품은 지난달 말부터 홈플러스에 불닭볶음면을 비롯한 라면·소스류 등 주요 제품 납품을 중단했다. 납품 후 회수하지 못한 대금이 늘어나면서 신규 물량 투입을 멈춘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홈플러스에서 판매 중인 삼양식품 제품은 모두 기존 재고다.

아모레퍼시픽도 미수 대금 회수가 원활하지 않아 지난 8월부터 홈플러스에 대한 신규 납품을 끊었다. 홈플러스 내 화장품 매장에서 판매되는 브랜드 제품들이 대상이며, 회사 측은 “현재는 8월 이전 공급분만 판매 중”이라고 설명했다.
납품을 전면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물량을 축소하거나 수시 조정하는 업체들도 적지 않다. LG생활건강은 최근 홈플러스에 공급하는 치약·세제·샴푸 등 생활용품과 일부 음료(코카콜라 등) 물량을 줄였다. 오리온이 공급하는 과자 제품은 기존의 80~90%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한 오리온 관계자는 “납품은 계속하고 있지만 홈플러스 경영 악화가 본격화하기 이전과 비교하면 물량이 줄었다”고 말했다.
롯데웰푸드는 과자·아이스크림·냉동식품 등 주요 품목의 공급은 유지하면서도 대금 상황을 고려해 납품 물량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롯데웰푸드 관계자는 “납품 상황은 계속 바뀌고 있다”며 “채권이 더 늘지 않도록 보수적으로 물량을 조정 중”이라고 밝혔다.
반면 상당수 식음료·생필품 업체는 아직까지는 기존과 동일한 수준으로 상품을 공급하고 있다. CJ제일제당, 풀무원, 오뚜기, 동원산업, 애경산업, 하이트진로, 대상, 서울우유, 매일유업, 남양유업 등은 “납품 상황에 변동이 없다”고 전했다. 다만 홈플러스 측과 수시로 협의를 이어가며 발주와 대금 정산 추이를 면밀히 살피는 분위기다.
일부 업체는 홈플러스가 지난 3월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간 직후 납품을 한 차례 끊었다가 거래 조건 조정 뒤 재개한 이력도 있다. 서울우유를 비롯해 농심, 오뚜기, 롯데칠성음료는 회생 신청 이후 거래 조건 변경 문제로 납품을 중단했다가 이후 협의를 거쳐 공급을 재개했다. 5월에는 빙그레와 매일유업도 대금·물량 문제로 납품을 멈췄으나, 6월 합의를 통해 다시 정상 공급 체제로 전환했다.
식품업계의 한 관계자는 “홈플러스 발주 상황에 따라 납품 물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어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다”며 “매장 방문 소비자가 줄면 판매량도 감소하는 구조라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물량을 줄인다거나 중단한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협력사들이 판매망과 채권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구조적 한계를 지적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홈플러스의 자금 사정은 지속적으로 악화하는 모습이다. 회사는 아직 뚜렷한 인수 의향자를 찾지 못한 가운데, 협력사 및 입점 점주에게 지급해야 할 대금뿐 아니라 종합부동산세·부가가치세 등 각종 세금 약 700억 원을 미납한 상태다. 여기에 전기요금 체납분과 국민연금까지 포함하면 미지급액은 900억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점포 구조조정 움직움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현재 영업 중단을 검토 중인 점포는 서울 가양점, 부산 장림점, 경기 고양 일산점, 경기 수원 원천점, 울산 북구점 등 5곳으로 알려졌다. 인근 상권과 입점 점주, 협력 업체에 미치는 파장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앞서 홈플러스는 지난 8월 서울 시흥점, 서울 가양점, 경기 고양 일산점, 경기 안산고잔점, 경기 화성동탄점, 충남 천안신방점, 대전 문화점, 전북 전주완산점, 부산 감만점, 울산 남구점 등 15개 점포에 대해 폐점을 예고했다. 그러나 9월 들어 폐점 결정을 한 차례 보류한 바 있다. 당시에도 대규모 점포 정리에 따른 고용 축소와 지역 상권 위축 우려가 제기됐었다.
업계 안팎에서는 홈플러스 사태가 대형마트와 협력사 간 ‘갑을 구조’ 문제를 넘어, 대형 유통채널 의존도가 높은 식품·생필품 기업들의 구조적 위험을 드러낸 사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협력사들은 판매망 축소와 채권 회수 위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고, 소비자는 품목별 품절과 가격 변동, 지역 점포 폐점에 따른 불편을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커졌다.
향후 홈플러스의 회생 절차 진행과 신규 투자자 유치 여부, 점포 정리 범위에 따라 협력사 거래 구조와 지역 상권, 소비자 선택권에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거래 안정성과 채권 보호 장치를 강화할 제도 개선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어, 책임 공방과 제도 논의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