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 리스크 차단”…KT, 이해충돌 사외이사 해임
통신 인프라와 디지털 전환을 주도하는 대형 IT 기업의 지배구조 관리가 한층 엄격해지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KT가 최대주주 그룹 계열사와의 이해관계 충돌 소지가 제기된 사외이사를 사임이 아닌 직 상실 처리로 정리하면서, 국내 ICT 산업 전반에 사외이사 겸직 기준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전망이다. 특히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인공지능 인프라 등 대규모 투자가 걸린 상황에서 이사회 독립성은 투자자와 규제당국이 중점적으로 보는 리스크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가 통신과 플랫폼, 배터리, 모빌리티 등 상호 출자가 얽힌 IT·제조 융합 구도에서 ‘이해상충 관리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KT는 12월 17일 공시를 통해 조승아 사외이사가 사외이사 결격사유에 해당해 직을 상실하게 됐다고 밝혔다. 회사 측은 정기주주총회 상정을 위한 사외이사 후보군 심사 과정에서 조 이사가 최대주주 계열사인 현대제철의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는 사실을 재점검했고, 상법상 사외이사 자격 요건에 저촉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쟁점의 핵심은 상법 제542조의 8 제2항이다. 해당 조항은 상장회사에서 사외이사는 회사와 경영상 밀접한 이해관계가 없어야 하고,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기 곤란하거나 회사 경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사외이사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자본과 사업이 얽힌 계열 집단 간 거래에서 사외이사가 어느 한쪽 이해를 대변할 위험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장치다.
조승아 이사는 2023년 6월 KT 사외이사로 선임된 이후 2024년 3월 현대제철 사외이사를 겸직했다. 겸직 시점에는 KT와 현대제철이 별도 그룹 소속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해관계 충돌 문제는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보유하던 KT 지분을 매각하면서 현대차그룹이 KT의 최대주주로 올라섰고, 현대제철이 현대차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점을 고려하면 조 이사가 사실상 최대주주 측 이해와 KT 이사회 독립성을 동시에 대표하는 구조가 됐다는 점이 문제로 떠올랐다.
KT 관계자는 내년 정기주주총회용 사외이사 후보 추천 심사 과정에서 조 이사의 지위에 법적 이슈 소지가 있음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2023년 최초 선임 당시에는 현대차그룹이 최대주주가 아니었고, 그 이후 국민연금의 지분 매각과 최대주주 변경이라는 외부 요인으로 이해관계 충돌 상황이 사후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회사는 해당 사안을 이사회에 보고하고 내부 검토를 거쳐 직 상실 결정을 공시했다.
KT는 사외이사 겸직 시점 이후 열린 이사회와 이사회 내 위원회에서의 의결 내용을 점검한 결과, 모든 안건의 결의 요건은 적법하게 충족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덧붙였다. 과거 의사결정의 무효 가능성이라는 추가 지배구조 리스크는 현재 단계에서 크지 않다는 취지다. 다만 향후 주주나 이해관계자가 문제를 제기할 경우, 이사회 내 이해상충 관리 절차를 얼마나 충실히 거쳤는지 여부가 분쟁의 쟁점이 될 여지는 남아 있다.
이번 사안은 통신과 IT 서비스 기업이 왜 사외이사 독립성을 중시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5G 네트워크,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인공지능 인프라 등 KT의 주력 사업은 대규모 설비 투자와 장기 공급 계약이 필수적인 영역이다. 이 과정에서 최대주주 계열사와의 장기 공급 계약이나 합작 법인 설립, 공동 투자 등이 논의될 경우, 특정 그룹 이해를 대변하는 인사가 이사회에 참여하면 공정한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의심이 투자자와 규제기관 모두로부터 제기될 수 있다.
국내 통신 3사는 이미 디지털 헬스케어, AI콜센터, 클라우드, 모빌리티, 스마트팩토리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히고 있어, 계열 제조사 및 플랫폼 기업과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추세다. KT와 현대차그룹의 경우 모빌리티 데이터, 커넥티드카 통신, 배터리 관리 시스템,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등에서 중장기 협업 가능성이 거론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사외이사가 양측에 동시에 몸담을 경우 기술 제휴 조건, 공동 투자 구조 설정 등에서 특정 쪽에 유리한 결정을 유도할 여지가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글로벌 ICT 기업들도 지배구조 이슈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흐름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통신사, 클라우드, 반도체 기업들이 규제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이사회 다수 이상을 독립 사외이사로 구성하고 이해상충 가능성이 있는 겸직을 사전에 차단하는 규정을 두는 사례가 늘고 있다. 특히 데이터 독점, 플랫폼 시장 지배력 논란이 커지면서 독립 이사가 개인정보 보호, 알고리즘 투명성, 공정경쟁 정책을 견제하는 역할을 강조받는 분위기다.
국내 제도 환경에서도 상법과 자본시장법, 기업지배구조 보고서 공시 제도가 맞물리며 상장 IT 기업의 사외이사 자격 심사가 갈수록 엄격해지는 양상이다. 공정거래, 대규모 내부거래, 계열사 지원행위 규제가 강화되면서, 대기업 집단 소속 IT 회사가 그룹 계열사 출신 사외이사를 선임하려 할 경우 이해관계 충돌 검토가 필수 절차로 자리 잡았다. 특히 금융·통신·플랫폼처럼 개인정보와 네트워크 인프라를 다루는 업종은 규제기관이 이사회 구조를 별도로 들여다보는 경향이 강하다.
전문가들은 이번 KT 사례가 단발성 인사 이슈를 넘어, 향후 IT와 제조, 모빌리티, 바이오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사외이사 겸직과 독립성 기준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본다. 한 지배구조 연구자는 최대주주 변경이나 인수합병 등으로 이해관계 지형이 바뀔 수 있는 만큼, 사외이사 선임 시점뿐 아니라 재임 중 정기적인 이해상충 점검 프로세스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며, 기술 융합이 가속화될수록 이사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기업가치의 핵심 변수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통신과 IT 기업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복잡해질수록 지배구조는 단순한 형식 요건이 아니라 규제 리스크와 투자 매력도, 장기 기술 전략의 신뢰도를 좌우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산업계는 이번 KT의 사외이사 해임 결정이 향후 대기업 IT·바이오 융합 그룹 전반의 이사회 구조에 어떤 기준점으로 작동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