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신약개발 혁신성 급부상…중국·한국 빅파마 레이더에
아시아가 글로벌 신약 개발 지형을 바꾸는 새로운 성장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 편중됐던 혁신 신약 파이프라인이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면서, 다국적 제약사와 글로벌 투자자들의 시선도 아시아로 쏠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특히 중국의 공격적인 기술 거래와 한국의 제형·약물전달 기술력이 결합되면서, 향후 아시아가 ‘후발 주자’가 아닌 글로벌 파트너이자 신흥 허브로 부상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허혜민 키움증권 연구원은 2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25 제약바이오투자대전에서 최근 글로벌 신약 개발 프로젝트 동향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허 연구원은 아시아가 R&D 성장 엔진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며 세계 혁신 신약 프로젝트 분포에서 중국과 한국의 위상이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2024년 기준 새롭게 전임상 또는 임상 단계에 진입한 혁신 신약 프로젝트 비중을 보면 미국이 36퍼센트로 가장 크고, 중국이 33퍼센트로 미국과 거의 대등한 수준에 도달했다. 한국도 10퍼센트를 기록하며 3위를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미국과 유럽이 절대 우위를 보여 왔던 초창기 파이프라인 단계에서 아시아 비중이 두드러지게 높아진 것이다.
다만 계열 내 최초 신약으로 불리는 혁신신약의 탄생지는 여전히 미국과 유럽이 중심이다. 허 연구원은 글로벌 혁신 신약의 약 50퍼센트가 미국에서 나오고 있으며, 중국 비중은 3퍼센트 안팎에 그친다고 분석했다. 아시아 전체로 보면 완전히 새로운 타깃이나 작용기전을 여는 ‘퍼스트 인 클래스’보다는, 기존 검증된 타깃과 기전을 바탕으로 차별화 요소를 추가하는 ‘폴로온 이노베이션’ 중심의 개발이 많다는 해석이다.
허 연구원은 이러한 구조가 기술 거래 측면에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폴로온 이노베이션 위주 파이프라인을 가진 중국과, 제형 변경과 약물 전달 기술에서 강점을 가진 한국에서 기술 이전과 라이선스 아웃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고, 당분간 이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글로벌 제약사가 리스크를 줄이면서도 혁신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 파트너의 검증된 타깃과 플랫폼을 선호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는 의미다.
기술 거래 규모에서도 중국은 존재감을 과시했다. 올해 최대 마일스톤 기준 상위 10대 기술 이전 딜 가운데 7건을 중국이 가져가며 사실상 시장을 주도했다. 미국 바이오텍은 2건에 그치며 상대적으로 밀렸다. 마일스톤은 단계별 기술료 구조로 계약된 기술 이전 거래에서 향후 개발 단계별로 받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을 뜻하는데, 상위권을 중국이 싹쓸이했다는 점은 글로벌 빅파마가 중국 파이프라인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허 연구원은 중국발 딜의 특징으로 기존에 승인된 타깃을 활용하면서도 성공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이중항체와 같은 고부가가치 모달리티에 집중하는 점을 꼽았다. 이중항체는 하나의 약물이 두 개의 서로 다른 항원을 동시에 인식하도록 설계된 항체로, 효능을 높이면서도 기전 다변화를 꾀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여기에 RNA 간섭을 활용해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하는 siRNA, 그리고 구조 기반 설계와 후보물질 스크리닝을 고도화하는 AI 신약 개발 기술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는 패턴이 뚜렷하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한국 파이프라인의 전략적 가치도 높아지는 분위기다. 허 연구원은 제형 변경과 약물 전달 기술을 통해 복용 편의성, 약효 지속시간, 부작용 프로파일을 개선하는 데 강점을 가진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빅파마 입장에서 매력적인 파트너로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짚었다. 이미 여러 한국 바이오텍이 장기지속형 제형, 피하주사 전환 제형, 약물 전달 플랫폼 등을 매개로 미국과 유럽 제약사에 기술을 이전하며 트랙 레코드를 쌓아 왔다.
한편 이날 행사의 또 다른 축은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이었다. 셀트리온그룹 권기성 수석부사장은 발표를 통해 국내 바이오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앵커기업 역할과 함께 향후 중국과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앵커기업은 스타트업과 중소 바이오기업의 성장 전 주기를 지원하는 중심축 역할을 맡는 대기업을 뜻한다.
권 부사장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중국으로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을 확장할 방침을 언급하면서, 중국이 초기 임상 연구를 진행하기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 내 풍부한 환자 풀, 비교적 빠른 등록 속도, 유연한 임상 설계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향후 글로벌 신약 개발 과정에서 중국 임상을 한국과 미국, 일본 등의 개발 전략과 연계할 수 있다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내다봤다. 이날 인천시와 체결한 협력 관계도 이런 전략을 실행하는 기반으로 활용하겠다고 덧붙였다.
셀트리온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투자 측면에서만 보면 지난 11년 동안 8개 펀드를 조성해 운용하며 투자 회수와 재투자를 반복하는 선순환 모델을 구축해 왔다. 단순 지분 투자에 그치지 않고 연구개발 협업, 임상 공동 수행, 글로벌 허가 전략 수립 등 다층적인 지원 체계를 가동하며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의 스케일업을 돕고 있다.
권 부사장은 국내 바이오산업이 지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유망 스타트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이 단기 수익이 아닌 산업 생태계 조성 관점에서 전주기 지원 구조를 마련해야 하며, 앵커기업 역할을 자임한 셀트리온도 투자와 공동 연구, 글로벌 네트워크 공유를 통해 그 역할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중국과 한국을 축으로 한 아시아 신약 개발 생태계가 글로벌 이노베이션 지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앞으로 더 커질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이 여전히 혁신신약의 핵심 공급원이라는 점은 변함없지만, 기술 거래와 임상 실행, 후속 개량 영역에서 아시아가 전략적 파트너이자 경쟁자로 동시에 부상하는 구도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계는 아시아발 기술과 자본, 인력이 결합한 새로운 신약 개발 네트워크가 실제 시장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지켜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