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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침범 간암도 나눈다”…삼성, 위험도별 맞춤치료 제시

강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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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을 침범한 진행성 간암도 위험도를 세분화해 맞춤형으로 치료하면 생존율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됐다. 동일한 BCLC C기 간암으로 묶여 있던 환자군을 간 기능, 종양 크기, 침범 양상 등 복합 지표로 다시 나누고, 각 위험도에 따라 최적의 치료 조합을 제시한 것으로, 간암 분야 치료 알고리즘 재편의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업계에서는 향후 면역항암제와 국소치료 병합 전략 선택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삼성서울병원 방사선종양학과 박희철·유정일·김나리 교수 연구팀은 혈관 침범이 확인된 간암 환자 526명을 대상으로 치료 방법별 예후를 분석한 결과를 국제학술지 방사선종양학 최근호에 발표했다. 논문은 혈관 침범 간암 환자의 위험도를 정밀하게 예측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이 모델에 기반한 치료 전략이 생존 이득과 직결된다는 점을 수치로 제시했다.

간암에서 암세포가 간에 혈류를 공급하는 간 문맥 등 주요 혈관을 침범하면 암이 간 전체로 확산되거나 폐·뼈 등 다른 장기로 전이할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진다. 이 과정에서 간 기능이 빠르게 악화되면서 전신 상태가 떨어져 기존 항암·국소치료 효과도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혈관 침범 간암은 국제 표준 병기 체계인 BCLC 분류에서 진행성 간암 단계인 C기로 분류되며, 예후가 불량한 집단으로 자리 잡아 왔다.

 

현재 BCLC C기 혈관 침범 간암 환자에게는 간동맥화학색전술과 방사선 치료를 병합하는 전략, 표적항암제인 티로신키나제억제제와 방사선 병합, 그리고 최근에는 아테졸리주맙·베바시주맙과 같은 면역항암제 단독 요법이나 방사선 병합 요법 등 다양한 조합이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병기를 기준으로 비슷한 치료를 받았음에도 환자별 전체 생존 기간이 5.8개월에서 98.4개월까지 크게 갈리면서, 어떤 환자에게 어떤 치료를 우선 적용해야 하는지 임상 현장에서 혼선이 컸다.

 

연구팀은 이런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환자의 간 기능 지표, 종양 크기와 분포, 혈관 침범 형태, 간 외 전이 여부 등 임상 정보를 종합해 새로운 위험도 예측 모델을 구축했다. 단일 기준이 아닌 다중 변수 기반 점수 체계로 설계해, 같은 BCLC C기 안에서도 초저위험, 저위험, 중등도 위험, 고위험 등 네 단계로 환자를 세분화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중앙 추적 관찰 기간 11.6개월 동안 이 모델은 환자 예후를 유의미하게 가려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진행 생존기간 중앙값은 초저위험군이 11.4개월이었던 반면 고위험군은 1.9개월에 그쳐, 질병 진행 속도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전체 생존기간 중앙값도 초저위험군 47.3개월, 고위험군 6.6개월로 격차가 컸다. 연구팀은 동일 병기 내에서도 치료 전략을 달리해야 할 만큼 근본적으로 다른 환자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라고 해석했다.

 

새 모델의 예측력은 기존에 널리 활용되던 IMbrave150 기반 모델과 비교해도 우위로 나타났다. 1년, 2년, 3년 시점에서의 생존과 재발 위험 예측 정확도가 모두 더 높게 측정돼, 혈관 침범 간암 환자군 특성을 더 정밀하게 반영한 체계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밀 예측 모델이 뒷받침되면서, 실제 치료 전략을 어떻게 달리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가능해졌다.

 

연구팀은 위험도에 따라 최적의 치료법이 다르다는 점도 함께 제시했다. 우선 초저위험·저위험군처럼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은 환자들에게는 기존 표준으로 쓰여 온 간동맥화학색전술과 방사선 복합 치료, 즉 TACE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는 전략이 가장 우수한 성적을 냈다. 종양 혈류를 차단하면서 방사선으로 국소 제어를 강화하는 이 조합이 저위험군에서는 충분한 종양 축소와 장기 생존을 뒷받침한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중등도·고위험군에서는 면역항암제 기반 치료가 경쟁력을 보였다. 아테졸리주맙과 베바시주맙에 방사선 치료를 병합한 AB+RT 조합은 기존 TACE+RT 대비 질병 진행 위험을 43퍼센트 낮추고, 사망 위험도 24퍼센트 줄인 것으로 분석됐다. 면역항암제 단독 요법인 AB만 적용한 경우에도 TACE+RT 대비 사망 위험이 약 62퍼센트 감소해, 고위험 집단에서 전신 면역 조절 기전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연구팀은 방사선 치료가 종양 세포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종양 관련 항원을 노출시켜 면역계를 자극하는 일종의 백신 효과를 내고, 이로 인해 면역항암제의 반응률과 반응 지속 기간이 향상되는 시너지 효과가 작용한 것으로 해석했다. 혈관 침범이 심하고 종양 부담이 큰 집단일수록, 국소 제어에 더해 전신 면역 활성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도 재확인된 셈이다.

 

이번 연구는 혈관 침범 간암 환자를 일괄적으로 고위험 진행성 간암으로 다루던 기존 틀에서 벗어나, 위험도 기반 맞춤 치료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실제 임상에서 이미 사용 중인 TACE, 방사선, 표적항암제, 면역항암제를 조합해 얻은 실데이터를 바탕으로 모델이 설계됐다는 점에서, 향후 치료 가이드라인 개정 과정에서도 참고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유정일 교수는 혈관 침범 간암 환자군을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보는 접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는 병기만으로 치료법을 정하기보다, 새롭게 제안된 위험도 예측 모델을 통해 환자 개인에 가장 유리한 치료 조합을 찾는 것이 생존율을 높이는 지름길이라고 설명했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이 모델이 실제 진료지침과 임상 현장에 얼마나 빠르게 안착할지, 그리고 차세대 면역·방사선 병합 요법 개발 방향에 어떤 영향을 줄지 주시하고 있다.

강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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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서울병원#위험도예측모델#혈관침범간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