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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약 장기지속형 승부처 부상…K바이오, 플랫폼 기술로 맞선다

한채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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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 치료제 시장의 다음 승부처가 장기 지속형 제형으로 옮겨가고 있다. 주 1회 주사로 시장을 장악한 기존 약물 구조가 흔들리면서, 월 1회 투여만으로 약효를 유지하는 기술 경쟁이 본격화되는 분위기다. 글로벌 빅파마가 특허 만료 이전에 새로운 제형으로 시장 지배력을 연장하려는 가운데, 장기 지속형 약물 전달 플랫폼을 보유한 국내 바이오 기업을 향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내년을 글로벌와 K바이오 간 장기지속형 파트너십의 분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29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엄민용 신한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조사분석자료에서 1개월 제형 경쟁이 빠르게 가속하는 가운데, 빅파마와 협업 중인 장기 지속형 제형 기술의 가치가 함께 상승하고 있다고 짚었다. 현재 비만 치료제 시장의 대표 제품인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와 일라이 라릴리의 마운자로는 모두 주 1회 피하주사 방식이다. 다만 환자 순응도와 복약 편의성 제고가 핵심 과제로 떠오르면서, 월 1회 투여로 체중 감소 효과를 유지하는 장기 지속형 주사제 개발이 업계 공통의 목표가 됐다.

엄 연구위원은 경구 비만약의 상용화가 주 1회 주사제와 직접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며, 주사제 영역에서는 1개월 제형이 차별화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경구제의 장점인 복용 편의성이 부각될수록, 주사제는 투여 횟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기 지속형 제형은 같은 유효성이라도 투약 빈도를 줄여 환자 복약 순응도를 높이고, 장기 치료가 필요한 비만 관리의 특성과도 맞아떨어지는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글로벌에서는 이미 1개월 제형 경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일라이 라릴리의 파트너사인 스웨덴 제약사 카무루스는 최근 월 1회 투여 장기 지속형 비만 치료제 CAM2056의 임상 1b상 톱라인 결과를 발표했다. 카무루스는 독자적인 장기 지속형 약물 전달 플랫폼 플루이드크리스탈을 활용해 주사 부위에서 약물이 서서히 방출되도록 설계했다. 해당 플랫폼은 약물이 지질기반 액정 구조 안에 포집돼 체내에서 서서히 분해되면서 일정한 농도로 방출되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임상 결과에서 CAM2056은 주 1회 투여하는 세마글루티드 기반 위고비와 비교했을 때 체중 감소뿐 아니라 당화혈색소와 공복 혈당 감소에서도 유사하거나 일부 지표에서 상회하는 효능을 보였다. 투약 횟수를 4분의 1로 줄이면서도 기존 세마글루티드 대비 동등 이상의 효과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카무루스는 앞서 일라이 라릴리와 최대 8억7000만 달러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맺고 CAM2056을 포함한 장기 지속형 비만 치료제를 공동 개발 중이다.

 

시장 측면에서는 특허 만료 일정이 기술 경쟁의 속도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 엄 연구위원은 위고비의 유럽 특허 만료 시점이 2031년, 미국이 2032년으로 예정된 만큼, 이 시점 이전에 장기 지속형 제형 파이프라인을 상업화 단계로 끌어올리려면 내년 안에 최소 임상 1상에 진입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대형 제약사 입장에서는 기존 세마글루티드 계열 또는 새로운 기전의 비만약을 장기 지속형 플랫폼에 접목해 특허 수명과 시장 점유율을 최대한 연장하려는 전략이 불가피하다는 평가다.

 

이런 흐름 속에서 국내 장기 지속형 플랫폼 기업과 글로벌 빅파마 간 협력도 속도를 내고 있다. 펩트론은 지난해 10월 일라이 라릴리와 플랫폼 기술 평가 계약을 체결하고 장기 지속형 약물 전달 기술 스마트데포를 라릴리의 펩타이드 계열 비만약 후보에 적용하는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스마트데포는 약물을 특수 고분자 미립자에 탑재해 체내에서 일정 기간 동안 서서히 방출되도록 설계한 기술로, 한 번 투여로 수주에 걸쳐 약효를 지속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신한투자증권 보고서는 일라이 라릴리가 현재 펩트론의 스마트데포에 대한 기술 검증을 진행 중으로, 결과에 따라 본계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기술평가 단계를 거친 후 대규모 마일스톤과 로열티 조건을 포함한 라이선스 아웃 계약으로 전환될 경우, 국내 비만 치료제 플랫폼 기업 가운데 첫 글로벌 빅파마 본계약 사례가 될 수 있다. 업계에서는 펩트론이 이미 다른 적응증에서 장기 지속형 제형을 상용화한 경험을 바탕으로 비만 영역에서도 신뢰도를 인정받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지투지바이오 역시 장기 지속형 플랫폼 인노램프를 기반으로 세마글루티드 1개월 및 3개월 제형 개발을 병행하고 있다. 인노램프는 지질 나노입자 기반 구조 안에 약물을 탑재해 체내에서 분해 속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한 번 주사로 최대 분기 단위까지 약효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투지바이오는 독일계 베링거인겔하임과 유럽 소재 제약사 등과 장기 지속형 비만 치료제 공동개발을 진행 중이며, 사전 합의된 연구 성과를 충족할 경우 연속적인 본계약과 라이선스 아웃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국내 기업에게 장기 지속형 플랫폼은 단순 제형 변경을 넘어, 비만을 포함한 광범위한 대사질환 영역에서 글로벌 파트너십을 확대할 수 있는 전략 자산으로 평가된다. 플랫폼 기술 하나로 GLP 1 계열뿐 아니라 다중 수용체 작용제, 병용요법 후보 등에 적용 가능해 포트폴리오 확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 제약사는 이미 비만약 후보 물질과 임상 인프라를 확보하고 있지만, 장기 지속형 제형 설계 기술을 내재화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외부 플랫폼 수요가 상당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규제와 생산 인프라는 상용화까지 넘어야 할 관문이다. 장기 지속형 제형은 주사 부위 반응, 장기간 체내 잔류에 따른 안전성 검증, 약물 방출 프로파일 검증 등에서 기존 주 1회 제형보다 엄격한 임상 설계를 요구받을 가능성이 크다. 또 미리 충전된 프리필드 시린지나 자가주사 기기 등 의료기기와의 결합 설계가 중요해지면서, 의약품과 의료기기 규제 모두를 고려해야 하는 복합 제품으로 분류될 여지도 있다. 생산 측면에서도 고분자 또는 지질 기반 나노구조의 일관된 품질 관리가 관건으로 꼽힌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위고비와 마운자로가 폭발적인 수요를 기록하면서, 후속 세대인 장기 지속형 비만 치료제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장기 비만 관리가 보험 체계와 공중보건 정책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면서, 더 편의성이 높고 의료 자원 소모가 적은 제형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국내에서도 비만을 만성질환으로 관리하는 방향의 보험 제도 논의가 속도를 낼 경우, 장기 지속형 제형의 시장성은 한층 커질 수 있다.

 

엄 연구위원은 내년을 국내 장기 지속형 비만 치료제 플랫폼 기업이 확보한 다수의 공동개발 프로젝트가 본계약으로 전환되는 원년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위고비 특허 만료를 앞둔 글로벌 빅파마의 전략적 선택이 가시화되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K바이오의 장기 지속형 플랫폼 가치도 함께 재평가될 여지가 있다는 분석이다. 산업계는 국내 기술이 실제 글로벌 비만 치료제 시장에서 의미 있는 파트너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채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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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트론#지투지바이오#일라이라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