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망법 개정 역외효과 우려"…미국, 디지털 규제 경고 파장
한국의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으로 불리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이 글로벌 디지털 규제 갈등의 한복판에 섰다. 인공지능 기반 딥페이크와 허위조작정보를 차단하겠다는 한국 정부와, 표현의 자유와 온라인 플랫폼 비즈니스 위축을 우려하는 미국 정부 입장이 정면 충돌한 모양새다. 특히 미국이 이 법을 역외적 규제로 지목하면서, 플랫폼 사업자를 둘러싼 한미 간 디지털 규범 경쟁의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국 국무부는 31일 현지 시간 성명을 통해 한국 국회와 정부가 의결한 정통망법 개정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공식 표명했다. 국무부 대변인은 성명에서 미국은 한국 정부가 정보통신망법 개정을 의결한 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며 이 조치가 미국 기반 온라인 플랫폼 사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표현의 자유를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의 입법 절차와 구체적 시행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 정부가 개별 법률의 규제 방향을 놓고 직접적으로 우려를 드러낸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무부는 문제의 핵심을 디지털 서비스 영역의 규제 구조 변화로 보고 있다. 성명에서 한국은 디지털 서비스 영역에 불필요한 장벽들을 세워서는 안 된다며 관련 개정이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사전 검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한국의 정통망법 개정안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역외적 파생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며, 플랫폼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사전 검열을 강화하는 구조가 국경을 넘어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글로벌 규제 추세를 부추길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번 입장 표명은 하루 전 미국 정부 고위 당국자의 공개 비판에 이어 나온 것이다. 세라 로저스 국무부 공공외교 담당 차관은 전날 소셜미디어 엑스를 통해 한국의 정통망법 개정안은 표면적으로는 명예훼손적 딥페이크 문제를 시정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범위가 훨씬 넓어 기술 협력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개별 차관의 의견 정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으나, 국무부 대변인 명의 공식 성명이 뒤따르면서 한미 디지털 규범 논쟁이 외교 현안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커졌다.
논란의 중심에 선 정통망법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30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개정안의 골자는 고의로 불법 정보나 허위조작정보를 유통한 행위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까지 배상 책임을 지우는 징벌적 손해배상 구조다. 불법 콘텐츠 유통에 따른 사회적 피해 비용을 가해자에게 전가해 허위정보 생산과 확산을 억제하겠다는 취지다. 특히 AI 기반 딥페이크 음성·영상, 허위·과장 광고 등 기술 진화로 인한 피해 양상이 커지는 상황에서, 관련 콘텐츠 식별과 제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부는 개정안과 연계해 인공지능 표시제 도입도 병행하겠다는 입장이다. AI로 생성·편집된 콘텐츠임을 명확히 알리는 표식을 의무화해, 이용자가 딥페이크나 합성 콘텐츠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동시에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의 심의 범위를 확대해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서비스에서 유통되는 문제 콘텐츠에 대해 보다 신속한 심의를 보장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규제 사각지대였던 SNS와 동영상 플랫폼까지 심의 레이더 안에 편입하려는 시도다.
미국이 문제 삼는 지점은 이러한 규제가 실제 이행 과정에서 플랫폼 사업자에게 과도한 책임과 리스크를 전가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허위조작정보 유통에 따른 고액 배상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플랫폼은 법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이용자 게시물에 대한 선제적 삭제와 노출 제한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내부 정책을 조정할 가능성이 크다. 국무부가 사전 검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이런 구조에 주목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글로벌 플랫폼의 경우 한국 이용자 대상 서비스뿐 아니라 한국 내 접속이 가능한 다국적 서비스 전반에 영향을 받게 돼, 사실상 역외 규제처럼 작동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디지털 서비스 규제가 급격히 강화되는 것은 한국만의 흐름은 아니다. 유럽연합은 디지털서비스법을 통해 대형 플랫폼에 불법 콘텐츠 제거 의무와 알고리즘 투명성에 대한 강력한 요건을 부과했고, 플랫폼이 자체 콘텐츠 관리 체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 역시 아동 온라인 보호와 플랫폼 책임 범위를 둘러싼 입법 논의가 계속 진행 중이다. 다만 미국 정부는 표현의 자유와 혁신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며, 콘텐츠 규제보다는 자율 규범과 사후 책임에 무게를 싣는 방향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번 한국 법안을 향한 직접 비판은 이런 미국식 규범과 상충하는 요소를 강하게 인식했다는 방증으로 읽힌다.
AI 기반 딥페이크와 허위정보 확산이 국가 안보와 선거, 금융 시장까지 위협할 수 있는 수준으로 심화되는 상황에서, 각국 정부가 규제 수위를 높이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흐름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규제 대상과 책임 주체를 어디까지,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표현의 자유와 기술 혁신, 글로벌 협력 구도에 미치는 파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정통망법 개정은 피해 구제와 억지 효과를 강화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춘 반면, 미국은 규제가 플랫폼의 사전 검열을 유도해 결과적으로 민주적 공개 공간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는 셈이다.
국무부는 성명에서 우리는 한국이 새 법률이 한국 내와 국제적으로 표현의 자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신중히 검토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가 후속 시행령과 가이드라인에서 실제 적용 범위와 플랫폼 책임 정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이번 법이 글로벌 디지털 규범과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허위정보 문제에 대응하는 수단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규제 마찰의 단초가 될지가 갈릴 전망이다. 산업계와 외교가에서는 한미가 AI와 디지털 경제 협력 강화를 강조해 온 만큼, 표현의 자유와 플랫폼 책임 사이 균형점을 찾는 세부 조율이 향후 양국 협력의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계는 이번 규제가 실제 시장과 국제 협력 관계에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지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