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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습이 곧 아토피 치료"…WHO, 필수의약품 지정 파장

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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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습 중심의 피부장벽 관리 개념이 미용을 넘어 만성 피부질환 치료의 핵심 축으로 재정의되는 흐름이다. 세계보건기구가 특정 성분 조합의 보습제를 아토피피부염 관리용 필수의약품으로 공식 채택하면서, 보습제는 피부 미용 제품이 아닌 치료 전략의 출발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국내 의료계는 이번 조치가 과잉 미용 처방과 비근거 의료기기 사용 관행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피에르파브르 코리아는 11일 서울 드래곤시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바르는 의료기기 덱세릴 엠디크림과 동일 조성인 글리세롤 15퍼센트 함유 보습제 제형의 세계보건기구 필수의약품 등재 의미를 공유했다. 세계보건기구 필수의약품전문위원회는 내년 발간될 2025년 개정판에서 글리세롤 15~20퍼센트, 화이트 소프트 파라핀, 리퀴드 파라핀이 포함된 보습제를 아토피피부염 관리에 효과적인 의약품으로 등재했다. 덱세릴과 동일 조성을 가진 글리세롤 15퍼센트 보습제는 세계보건기구 기술 보고서 부록에서 참조의약품으로 명시됐다.

덱세릴 엠디크림은 2022년 국내에 도입된 크림 제형 점착성투명창상피복재로, 피부건조증 징후와 증상 완화를 목표로 설계됐다. 제품은 불필요한 첨가물을 줄이고 13개 성분만으로 조합된 최소 성분 구성에 기반해 피부 자극을 낮추는 설계를 채택했다. 이번 간담회는 해당 제형이 국제 기준에서 치료용 보습제로 인정받게 된 배경과 함께, 국내 임상 현장에서 축적된 실제 진료 경험 데이터를 공유하는 자리를 겸했다.

 

발표를 맡은 김현정 가천대학교 길병원 피부과 교수는 세계보건기구의 필수의약품 등재가 보습을 통한 피부장벽 관리의 치료적 역할을 국제적으로 승인한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아토피피부염과 같은 만성 피부질환에서 보습이 염증 억제제 못지않게 치료 전 과정에 관여하는 기본 전략임을 강조하며, 필수의약품 등재가 보습제를 화장품이 아닌 약제 범주로 명확히 위치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세계보건기구 기술 보고서에 담긴 등재 근거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해당 보습제가 피부장벽 회복과 건조 증상 개선에 기여한다는 임상적 근거가 축적돼 있다는 점이다. 둘째, 영유아부터 고령층까지 전 연령에서 장기간 사용했을 때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됐다는 점이다. 셋째,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아토피피부염과 만성 피부건조 질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필수 치료 수단이 필요하다는 공중보건적 판단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임상 현장에서의 실제 사용 경험도 제시됐다. 나정임 분당서울대학교병원 피부과 교수는 아토피피부염 치료 전략에서 염증 조절과 함께 피부장벽 회복을 병행해야 재발을 줄이고 약물 사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덱세릴 엠디크림 제형 보습제가 성인뿐 아니라 소아 아토피피부염 환자에서도 장기간 보조요법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지속 사용 시 재발률 저하와 국소 스테로이드 사용량 감소 효과가 관찰됐다고 소개했다.

 

이번 세계보건기구 결정은 아토피 관리 패턴의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계기로도 해석된다. 그동안 국내외 시장에서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창상피복재가 남용되거나, 고가 보습제가 미용 목적 처방에 활용되는 사례가 문제로 지적돼 왔다. 나 교수는 근거 기반 제형이 필수의약품 목록에 포함된 만큼, 향후에는 안전성과 유효성이 검증된 보습제를 중심으로 처방 체계가 재편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책·제도 측면에서 세계보건기구 필수의약품 등재는 각국의 약가 정책과 보험 적용 범위 설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다. 필수의약품 목록은 국가 차원의 필수 구비 의약품 선정, 공공조달 우선순위, 저소득층 접근성 보장 정책의 기준 자료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도 보습제의 치료적 위상과 급여 체계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논의가 뒤따를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장기 사용을 전제로 하는 제품 특성상, 성분 단순화와 알레르기 유발 물질 최소화 같은 규제 기준 강화 논의도 병행될 수 있다.

 

글로벌 시장 차원에서는 근거 기반 의료용 보습제와 일반 화장품형 보습제 사이 경계가 명확해지는 흐름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이미 의료기기 등록이나 의약품 허가를 받은 기능성 보습제가 아토피 관리 표준요법에 포함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특정 제형을 필수의약품으로 명시한 만큼, 후발 제약사와 바이오 기업이 유사 제형 개발과 제네릭 전략에 뛰어들 가능성도 거론된다.

 

업계는 이번 등재가 국내 접근성 개선으로 이어질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전현진 피에르파브르 코리아 대표는 의료 현장에서의 교육과 협력을 확대해 환자들이 적절한 보습 치료를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의료계에서는 아토피피부염과 만성 피부질환 관리에서 보습의 치료적 역할이 제도와 시장 구조에 얼마나 빠르게 반영될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계는 세계보건기구 결정이 실제 처방 패턴과 보험 구조를 바꾸는 동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지켜보는 분위기다.

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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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덱세릴#아토피피부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