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AI 투자에 보험 들기 시작했다”…월가, 테크기업 CDS 급증에 거품 우려 재부상

이소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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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기준 14일, 미국(USA) 금융시장에서 인공지능(AI) 산업을 둘러싼 과열 논란이 재점화되는 가운데 AI 관련 대형 기술주를 기초자산으로 한 신용부도스와프(CDS) 거래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빅테크들이 데이터센터와 AI 인프라에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는 사이 차입 부담과 성장세 둔화 우려가 부각되며, 글로벌 투자자들이 신용위험 헤지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영국(UK) 파이낸셜타임스(FT)는 15일 파생상품 청산기관 DTCC 자료를 인용해 AI를 선도하는 미국 빅테크 그룹과 연계된 CDS 거래량이 올해 9월 초부터 최근까지 약 90% 증가했다고 전했다. FT에 따르면 올해 초까지만 해도 AI 낙관론이 지배적이던 시기에는 주요 테크 기업 관련 CDS 수요가 크지 않았으나, 이후 AI 연산용 반도체 대량 매입과 데이터센터 증설이 이어지면서 신용 리스크를 의식한 헤지 수요가 빠르게 늘어났다.

AI 거품론 속 테크기업 CDS 거래 90% 급증…오라클·메타 신용위험 헤지 확대
AI 거품론 속 테크기업 CDS 거래 90% 급증…오라클·메타 신용위험 헤지 확대

CDS는 특정 기업이 부도나 채무불이행을 했을 때 손실을 보전해 주는 구조의 파생상품으로, 경기 둔화나 업황 악화에 대비한 ‘신용 보험’ 역할을 한다. 투자자들은 보유 채권이나 회사채 펀드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CDS를 매입하며, 거래량과 가격이 뛴다는 것은 해당 기업의 신용위험 인식이 높아졌거나 헤지 수요가 확대됐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최근 거래 증가세는 특히 대규모 설비투자를 위해 수십억달러 규모 자금을 조달한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 오라클과 코어위브를 중심으로 두드러진 것으로 전해졌다. 메타플랫폼(메타) 역시 올해 10월 AI 사업 자금 확보를 위해 300억달러 규모 회사채를 발행한 이후, 이 회사와 연동된 CDS 거래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메타, 아마존, 알파벳(구글 모회사), 오라클 등 4개 주요 테크 기업이 올가을 AI 프로젝트를 위해 조달한 자금만 880억달러(약 129조7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투자은행 JP모건은 투자적격 등급을 보유한 기업들의 AI 관련 자금 조달 규모가 2030년경 1조5천억달러(약 2천210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같은 조치는 주변국을 넘어 글로벌 금융시장 전반에도 파장을 미치고 있다. AI 자본 집약도가 높아질수록 채권 발행과 차입 확대가 불가피하고, 그만큼 신용위험 관리 수단에 대한 수요도 동반 확대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

 

미국의 한 대형 채권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FT와의 인터뷰에서 “빅테크 기업과 오라클, 메타에 대한 CDS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려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개별 종목 CDS 거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전했다. 그는 “현재 환경에서 위험을 분산하고 자산을 보호하려는 투자자에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기술주를 묶은 CDS 바스켓 상품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일 기업 위험보다 섹터 전체 리스크를 동시에 관리하려는 전략이 확산되는 모습이다.

 

AI 거품론은 2022년 말 챗GPT 등장 이후 AI 투자 열풍이 본격화되면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당시 미국과 유럽(Europe) 증시에서 AI 관련 종목들이 연일 신고가를 갈아치우자, 실적과 현금흐름보다 기대에 의존한 ‘또 다른 닷컴 버블’이라는 경고가 뒤따랐다. 최근 들어 빅테크의 대규모 투자에도 성장 속도가 둔화되는 조짐이 나타나면서 거품론이 다시 주목받는 국면이다.

 

오라클은 지난주 발표한 2026회계연도 2분기(올해 9∼11월) 실적에서 클라우드 인프라와 클라우드 판매 매출이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성장 모멘텀 둔화 우려가 커지자 주가 급락과 회사채 매도세가 동시에 나타났고, 이에 따라 오라클의 CDS 가격은 2009년 이후 최고 수준까지 치솟은 것으로 FT는 전했다. 이는 오라클을 둘러싼 신용 리스크 헤지 수요가 금융위기 이후 최대 수준으로 확대됐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AI 칩을 공급하는 브로드컴 역시 향후 제품 수주 잔고가 시장 기대를 밑돌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11∼12일 이틀 사이 주가가 약 11.4% 하락했다. AI 칩 시장 1위 업체 엔비디아 주가도 AI 거품론 논란을 피해가지 못하며 지난주(8∼12일)에만 5.7% 떨어졌다. AI 기술주의 성장 속도가 예전만 못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고평가 논란과 함께 신용·주가 리스크에 대한 경계심이 맞물리는 양상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14일(현지시각) 자사 리서치 부문인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자료를 인용해 애플, 엔비디아, 테슬라 등 이른바 ‘매그니피센트 7’으로 불리는 미국 7대 기술주의 내년 순이익 증가율이 18%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최근 4년 중 가장 낮은 수준으로, 과거 고성장에 익숙해진 시장 기대와는 차이가 크다. 이 증가율 전망치는 미국 대표 주가지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 전체 이익 증가율 전망을 소폭 웃도는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분석됐다.

 

현금흐름 측면에서도 부담이 드러나고 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메타와 마이크로소프트(MS)는 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 주주환원 정책을 감안할 때 내년에 잉여현금흐름(FCF)이 마이너스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된다. 알파벳의 내년 잉여현금흐름도 손익분기점에 가까운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됐다. AI 인프라 투자와 주주환원을 동시에 지속하기 위한 자금 압박이 커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

 

다만 AI 거품론을 둘러싼 시각은 엇갈린다. 블룸버그는 특히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 당시와 비교할 경우, 현재 AI 관련 종목들의 밸류에이션이 과도하게 높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분석을 전했다. 테크주 중심 지수인 나스닥 100의 현재 예상 이익 대비 주가배수(PER)는 약 26배 수준으로, 닷컴 버블 당시 80배를 웃돌던 수준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낮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AI 수혜주로 꼽히는 엔비디아, 알파벳, MS 등 개별 종목 역시 예상 이익 대비 주가가 30배 미만에 거래되고 있어, AI 성장성에 대한 시장 기대를 감안하면 비교적 합리적인 수준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구조적 디지털 전환과 생산성 향상을 촉발하는 범용 기술이라는 점에서, 과거 인터넷 붐과 단순 비교는 무리가 있다는 반론이다.

 

월가에서는 AI 인프라 투자 확대와 신용위험 헤지 수요 증가는 동시에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도 제기된다. 성장 산업인 만큼 자본 조달과 부채 확대는 불가피하지만, 과거 닷컴버블 붕괴 경험을 가진 투자자들은 CDS와 같은 파생상품을 통해 리스크를 사전에 분산하려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AI 관련 설비투자 규모와 이익 성장률, 밸류에이션 간 균형이 향후 시장 평가의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AI 산업의 장기 잠재력에는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단기적으로는 실적과 현금흐름에 대한 검증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AI 투자 열풍 속에서 테크기업 CDS 거래 급증이 보여 주는 리스크 관리 움직임이 향후 국제 금융시장과 기술주 흐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이소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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