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대법관 증원만으론 상고 적체 못풀어"…현직 부장판사, 단계적 증원·상고심 개편 제안

장예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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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심 제도 개편을 둘러싼 논쟁과 대법관 증원안을 사이에 두고 법원 안팎이 맞붙었다. 더불어민주당이 대법관을 26명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의 연내 처리를 추진하는 가운데, 현직 부장판사가 급격한 증원은 상고심 혼란과 전원합의체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8일 법원행정처와 법률신문이 9일부터 11일까지 사흘간 공동 주최하는 국민을 위한 사법제도 개편:방향과 과제 공청회 자료집에 따르면, 김도형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3기)는 현행 상고 제도 개편 논의와 관련해 더불어민주당의 대법관 26명 증원 구상에 우려를 나타냈다. 김 부장판사는 자료에서 “현행 상고 제도의 문제가 대법관의 증원으로 곧바로 해결되는 성격의 것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먼저 통계 자료를 근거로 대법관 수를 2배 가까이 늘려야 할 만큼 상고심이 예외적 위기 상황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상고심 접수 건수는 4만2천815건으로,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연평균 4만1천여건 수준과 비슷해 3심 사건 수가 이례적으로 폭증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또 심리불속행 기각 외 판결을 한 사건의 평균 처리 기간은 7.5개월로, 최근 10년간 가장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법관 업무가 과중해 심층적 숙의가 어렵고 상당수 사건이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정리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김 부장판사는 상고심 구조 자체에 대한 논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절대적 숫자로 볼 때 대법관에 과도한 사건처리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모든 사건을 상고할 수 있는 우리 법제에서 상고기각 결정과 심리불속행기각 제도가 외국의 상고허가제도와 유사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대법관 증원만으로 문제를 풀 수 없고, 상고심사제 도입과 하급심 권한 강화 같은 구조적 처방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상고심이 제 기능을 다하려면 사실심, 특히 1심 단계에서 신속하고 충실한 심리가 가능해야 한다며, 상고심 적체 논의의 초점을 3심이 아니라 1·2심 강화로 옮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급격한 대법관 증원의 부작용도 구체적으로 제기했다. 김 부장판사는 대법관이 26명으로 늘어날 경우 전원합의체 구성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져 대법원 재판 형태가 소부 심리 중심으로 굳어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는 25명의 대법관이 한 자리에 모여 합의체를 구성하면 “실질적 토론과 설득이 어렵고, 토론이 이뤄져도 시간도 2배 증가해 재판 지연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예산과 인력 배분 측면에서도 대법관 증원보다는 사실심에 대한 투자 확대가 사회·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김 부장판사는 “최근 10년간 추세를 보면 사건적체 문제가 심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심이고 상고심의 업무효율은 오히려 개선되고 있다”며 “상고심이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실심, 특히 1심에서 신속하고 충실한 심리가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하나의 전원합의체를 여전히 구성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제한적 증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법관 정수 상한선은 하나의 소부를 추가하는 수준인 4명이 적절하다며, 최대 17명 선에서 운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아울러 “한꺼번에 임명하게 될 경우 대법관 과반수 혹은 절대다수가 일시에 임명됨에 따라 정치적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며 “1년 또는 2년에 1∼2명씩 순차로 증원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법관 인선과 관련한 정치적 쏠림과 정권 영향력 논란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같은 공청회에서 상고 제도 개편방안 발표를 맡은 법무법인 동인 소속 오용규 변호사(사법연수원 28기)는 상고심 개선 논의를 대법원 내부 문제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부장판사 출신인 오 변호사는 상고제도 개선의 대전제로 심급제도의 유기적 연결, 상고심의 역할 정립, 선결 과제 정리, 대법원 구조 개편 방향 설정을 꼽았다.

 

그는 상고심 논의가 1심 및 2심의 운영 형태와 분리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상고심은 권리구제를 넘어 법령 해석과 적용의 통일이라는 공익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변호사는 “상고심 문제는 단순히 대법원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사실심인 1, 2심 충실화, 3심의 법률심화라는 전체 심급 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또 상고 제한 논의는 1심 재판의 충실화, 즉 사실심 강화가 먼저 전제돼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다. 상고심의 문턱을 높이는 대신 1심에서 사실관계를 충분히 다투고 입증할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야 국민 입장에서도 수긍할 수 있다는 취지다. 그는 대법원 구조 개편 또한 사실심 강화에 역행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 변호사는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 연방법원 구조와 상고허가제, 영국 허가 항소제, 독일 최고법원 구성과 상고허가제, 프랑스 최고법원인 파기원 운용 방식, 일본의 사법제도까지 주요국 사례를 폭넓게 소개했다. 아울러 과거 국내에서 논의됐던 상고법원 설치, 대법관 증원, 고등법원 상고부 설치, 상고허가제 재도입 등의 장단점을 비교 검토하며, 어느 한 가지 처방에만 기대기보다는 종합 설계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특히 그는 미국식 사법제도인 로스쿨과 법조일원화 도입 흐름에 맞춰 상소 제도도 상고 제한과 1심 중심 구조로 재편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증거개시, 배심제 같은 제도적 장치와 법조일원화 정착 등 임명 방식 변화가 조화를 이루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은 대법관 수를 현행 14명에서 26명으로 늘려 상고심 적체를 줄이겠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그러나 법원 내부에서조차 상고심 구조 개편과 사실심 강화 없이 대법관 증원부터 추진할 경우 오히려 전원합의체 약화, 재판 지연, 정치적 논란 확대라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 셈이다.

 

향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공청회 논의 내용을 토대로 대법관 증원 방식과 상고심 제도 전반을 다시 검토할 가능성이 크다. 여야가 상고심 구조 개편과 사실심 강화 방향을 놓고 추가 논의를 이어갈 경우, 법원조직법 개정안 처리 시기와 내용도 조정될 수 있다. 국회는 다음 회기에서 관련 법안 심사와 함께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본격 논의에 나설 계획이다.

장예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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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오용규#대법관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