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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0억 투입해 허가 240일로”…식약처, 인력·AI 규제과학 강화

권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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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헬스 산업을 둘러싼 규제 환경이 예산 확대와 함께 재편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인 8320억원의 2026년도 예산을 확정하면서, 허가·심사 인력 확충과 의료 인공지능 지원, 규제과학 인재 양성 등이 핵심 투자 축으로 떠올랐다. 업계에서는 이번 예산이 단순한 안전관리 강화 수준을 넘어, 신약과 의료기기, AI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의 시장 진입 속도를 좌우하는 규제 경쟁력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식약처는 4일 내년도 예산을 올해 7502억원보다 818억원 늘어난 8320억원으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당초 정부안 8122억원에서 국회 심사 과정에서 198억원이 증액된 결과다. 식약처 예산이 8000억원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안전관리와 동시에 산업 지원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는 설명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허가·심사 기능에 대한 직접 투자 확대다. 허가·심사 인력 확충·운영에만 155억원이 새로 편성됐고, 인허가 심사지원 관련 예산은 올해 286억원에서 내년 349억원으로 늘었다. 식약처는 바이오헬스 전 분야의 허가·심사 기간을 세계 최단 수준인 240일로 줄이기 위한 인력·시스템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뒷받침할 목적으로 신기술 분야 직무 전문교육을 고도화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신약, 첨단 재생의료, 디지털 치료제 등 고난도 품목에 대한 심사 역량을 집약하겠다는 취지다.

 

의료 인공지능을 포함한 AI 응용제품 상용화 지원도 별도 예산으로 분리해 키우는 방향이 확정됐다. 식품과 의료기기 등에서 AI를 적용한 제품이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내년도 AI 응용제품 신속 상용화 지원 항목에 150억원이 처음 책정됐다. 식약처는 국내 기업이 AI 기반 제품 개발 기간을 줄이고 조기에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AI 활용 유망 제품을 선정해 신속한 제품화와 심사 컨설팅, 규제 가이던스를 패키지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의료영상 판독, 진단보조 소프트웨어, 식품 안전 모니터링 솔루션 등이 대표적 대상이 될 전망이다.

 

규제과학 역량 강화를 위한 예산 증액도 두드러진다. 식의약 규제과학 혁신지원 강화 예산은 올해 5억원에서 내년 114억원으로 대폭 늘었고, 글로벌 규제과학 리더양성 사업 R&D에는 55억원이 신규 반영됐다. 식약처는 대학과 산업계, 연구소가 함께 참여하는 규제과학 인재양성 과정을 통해, 첨단 바이오헬스 제품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과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겠다는 구상이다. 글로벌 규제조화 논의에서 주도권을 확보해,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 시 인허가 장벽을 낮추는 효과도 노린다.

 

데이터 기반 심사체계를 위한 정보화 투자 역시 강화된다. 식의약 안전정보체계 선진화 예산은 올해 125억원에서 내년 177억원으로 증액됐다. 식약처는 의약품 허가·심사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해 제출자료 요건 검증, 반복적·규칙 기반 민원 처리, 자료 요약 및 보고서 작성 등 업무를 시스템이 수행하도록 해 심사 인력 부족을 완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의약품 허가 속도를 높여 환자 치료 기회를 넓히는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자동화 시스템 구축 로드맵도 제시됐다. 내년에는 제네릭의약품 심사부터 자동화를 시작하고, 2027년에는 원료의약품, 2028년에는 신약 허가·심사로 대상을 확대하는 단계적 계획이다. 반복성과 규칙성이 높은 공정 심사 영역을 우선 시스템에 맡기고, 고난도 평가와 위험도 판단은 심사 인력이 담당하는 이원화 구조를 통해 효율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전략이다.

 

온라인 식품 유통과 인공지능 기반 유통·마케팅 확산에 대응한 식품 분야 정보시스템 개편도 예산에 담겼다. 식약처는 현재 15종에 달하는 식품 분야 정보시스템을 통합하고 민원·행정 업무를 자동화하는 통합식품안전정보망 구축을 위한 정보화전략계획 ISP를 내년에 수립한다. 온라인 플랫폼과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식품 유통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데이터를 통합 분석해 위해 식품을 조기에 탐지하고 회수하는 디지털 감시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국내 바이오헬스 업계는 식약처의 이번 예산 확대를 규제 강화보다는 규제혁신을 위한 인프라 투자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허가·심사 인력과 데이터 기반 시스템, AI 산업 지원, 규제과학 인재 양성이 맞물릴 경우, 신약과 의료기기,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의 국내 심사 속도와 예측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 심사 기간 단축과 기업 체감도 제고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예산 집행 과정에서 인력 전문성 확보와 시스템 품질 관리가 관건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FDA와 유럽 의약품규제당국 등 주요 규제기관이 이미 디지털 심사체계, 리얼월드데이터 활용, AI 의료기기 가이드라인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가 예산 확충을 계기로 규제과학 역량을 끌어올리지 못할 경우, 첨단 바이오헬스 제품 허가 환경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도 공존한다. 산업계와 전문가들은 식약처 예산 8000억원 시대가 단순한 규모 확대를 넘어, 규제와 산업지원의 균형을 새로 짜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계는 이번 투자가 실제 시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허가 경쟁력으로 이어질지 주시하고 있다.

권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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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의약품안전처#바이오헬스#의료인공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