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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아 IQ 점수까지 본다”…영국, 다유전자 선별 확산에 논란

강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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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아 유전체를 기반으로 한 지능과 신장 예측이 생식의 선택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영국 일부 난임 환자들이 법과 규제의 빈틈을 활용해 배아의 유전 정보를 해외 민간기업에 보내고, 지능과 예상 신장, 질병 위험도를 점수화해 ‘순위’를 매기는 방식이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와 규제 당국은 유전체 분석 기술 고도화가 생식 의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동시에, 유전적 우월을 지향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명 윤리 논쟁을 촉발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영국 매체 보도에 따르면 일부 시험관아기 시술 예정 부부들은 IVF 과정에서 확보된 배아의 원시 유전체 데이터를 개인정보 접근 권한을 통해 수령한 뒤, 이를 미국 유전체 분석 기업으로 보내 다유전자 점수 평가를 의뢰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인간수정배아이식관리청이 정한 중증 유전질환에 한해서만 배아 선별 검사를 허용하고 있어, 키나 지능처럼 비의료적 특성을 겨냥한 다유전자 검사는 명백히 금지 대상이다. 그럼에도 환자가 자기 정보로 분류되는 원시 유전체 파일을 직접 수령하는 행위는 개인정보보호법상 보장돼 있어, 데이터가 국경을 넘어가면서 규제의 사각지대가 노출된 셈이다.

문제의 서비스는 미국 기업 헤라사이트가 제공하는 다유전자 기반 배아 분석이다. 이 회사는 수만 달러 수준의 비용을 받고 사실상 개수 제한 없이 배아의 다유전자 점수를 산출해 준다고 밝히고 있다. 다유전자 점수는 특정 형질과 연관된 수천에서 수만 개의 유전 변이를 통계적으로 통합해, 질환 발생 위험도나 키, 인지능력 등 복합 형질의 상대적 경향을 예측하는 기법이다. 헤라사이트는 이미 영국 환자들과 협업한 사실을 인정했지만, 자사가 영국 내 의료 규정을 직접 위반한 정황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분석을 요청한 주체가 환자 개인이고 시술도 해외와는 분리된 채 영국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근거로 든 것으로 해석된다.

 

다유전자 검사는 하나의 유전자가 특정 질환을 결정짓는 단일유전자 질환과 달리, 다수 유전자와 환경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형질을 통계적으로 추정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키의 경우 수백 개 이상의 유전자 변이가 관여하며, 각각의 영향력은 작지만 전체를 합산하면 평균보다 크거나 작은 경향을 수치로 제시할 수 있다. 지능과 같은 인지능력도 대규모 코호트 데이터를 기반으로 연관 변이를 찾아내 점수화한다. 다만 이런 예측은 인종과 인구집단에 따라 정확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고, 교육 수준이나 영양 상태처럼 비유전적 요인의 기여도가 매우 높아 절대적인 지표로 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다유전자 점수는 배아 단계에서 상대적인 ‘우열’을 가르는 수단으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 IVF에서 여러 배아가 생성될 경우, 전통적으로는 염색체 이상 여부나 특정 단일유전자 질환 보유 여부를 기반으로 선택했다. 여기에 다유전자 점수가 추가되면 동일한 건강 기준을 통과한 배아들 사이에서도 지능 예측치나 예상 신장, 당뇨병과 심혈관질환 위험도 같은 지표를 근거로 순위를 매길 수 있다. 특히 이번 사례에서처럼 규제가 느슨한 국가의 민간기업이 분석만 담당하고, 실제 시술은 규제가 엄격한 국가에서 진행될 경우, 어느 당국도 전체 과정을 포괄적으로 규율하기 어려운 구조가 된다.

 

영국 난임 클리닉 현장에서는 규제 집행의 실효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런던 Avenues 난임클리닉 크리스티나 힉먼 박사는 환자가 원시 유전체 데이터를 외부로 반출해 분석받는 행위를 현행 규제 틀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의료기관은 중증 유전질환에 한해 배아 검사를 의뢰하고 결과를 진료에 활용하는 것까지만 관여할 수 있고, 이후의 데이터 활용은 환자 개인의 결정 영역으로 남는 구조다. 여기에 유전체 분석 서비스가 국경을 넘어 디지털로 전송되는 특성까지 더해지며, 사실상 글로벌 차원의 생식 유전체 규제 공백이 드러난 셈이다.

 

영국 인간수정배아이식관리청은 다유전자 검사를 통한 배아 선택이 국내 의료 체계 안에서는 명백한 불법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동시에 환자가 해외 기업에 직접 데이터를 보내 분석하는 행위까지 막을 법적 근거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기관이 개별 환자의 데이터 흐름을 추적하거나 차단할 설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당국은 임상 현장에서 다유전자 점수를 근거로 배아를 선택하거나, 의료인이 이를 권유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속과 제재가 가능하다는 해석을 유지하고 있다.

 

과학계와 윤리 전문가들은 다유전자 점수의 과학적 불확실성과 함께 사회문화적 파장을 동시에 우려하고 있다. 카디프대 유전학자 앵거스 클라크 교수는 부모가 ‘최고의 아이’를 고르려는 선택을 부추기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능이나 외모, 키 등 사회가 선호하는 형질에 대한 선별이 정상화되면, 배아 단계에서부터 유전적 우월과 열등을 나누려는 시도가 제도권 밖에서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의 대상으로 취급된 아이가 성장 과정에서 가족과 사회로부터 과도한 기대와 압박을 동시에 받게 될 소지도 제기된다.

 

유전체 기반 생식 선택이 계층 간 격차를 더욱 고착화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고가의 다유전자 배아 분석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집단은 경제력이 높은 소수로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 장기적으로는 교육과 환경, 의료 서비스까지 결합되면서 유전적 선별과 사회경제적 자원이 맞물린 복합적 불평등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특히 기후 변화 적응력이나 특정 질환 저항성 등 미래 위험 요인을 둘러싼 ‘맞춤형 유전적 설계’ 수요까지 등장할 경우, 기술 격차가 사회 구조 전체의 균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있다.

 

한국에서는 이와 같은 다유전자 기반 배아 순위화가 법적으로 명확히 금지돼 있다. 생명윤리법은 배아 선별 검사를 중증 유전질환과 명백한 의학적 필요가 입증된 경우로 한정하고 있고, 지능이나 신체능력, 외모 등 비의료적 특성을 근거로 한 선별 행위는 금지 사항으로 규정한다. 보건복지부 역시 PGT P로 불리는 다유전자 기반 배아 분석은 허용 대상이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 국내 의료기관이 이런 배아 순위화 서비스를 시술하거나 환자에게 안내할 경우 행정처분은 물론 형사 처벌까지 이어질 수 있는 구조다.

 

다만 국내 규제가 엄격하더라도 유전체 데이터와 분석 서비스가 국경을 가볍게 넘나드는 디지털 환경에서는 해외 서비스를 우회 이용하려는 시도가 나올 여지도 존재한다. 규제 당국이 직접 환자 개인의 데이터 사용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점은 영국과 마찬가지다. 결국 법령 차원의 금지 조항과 더불어 의료 현장에서의 윤리 가이드라인, 유전체 분석 기업의 자율 규범, 환자 교육과 사회적 합의가 입체적으로 맞물려야 규범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유전체 분석과 생식 보조 기술의 결합은 향후 정밀의료와 희귀질환 예방에 기여할 여지도 크다. 동시에 유전적 선별이 어디까지 허용돼야 하는지, 무엇을 ‘질병’으로 보고 무엇을 ‘개인의 특성’으로 존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논의가 선행돼야 할 숙제로 남는다. 산업계와 규제 당국, 과학계가 과학적 유효성과 사회적 영향을 함께 검증하는 제도와 논의를 얼마나 빠르게 정비하느냐에 따라, 다유전자 기반 배아 선별 기술이 의료 혁신의 수단이 될지, 새로운 차별을 부르는 도구가 될지가 갈릴 가능성이 있다. 산업계는 결국 이 기술이 어디까지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각국의 제도와 사회적 합의 수준을 주시하고 있다.

강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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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배아선별#herasight#다유전자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