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헌정질서 지킬 책임 공유해야"…이재명, 5부 요인에 계엄 재판·사법개혁 신중론 주문

이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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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충돌 지점이 다시 선명해지는 가운데, 헌법기관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비상계엄 사태 1년을 맞아 이재명 대통령과 이른바 5부 요인이 마주 앉으면서, 헌정질서 수호와 사법제도 개편을 둘러싼 미묘한 긴장감도 부각됐다.  

 

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우원식 국회의장, 조희대 대법원장, 김상환 헌법재판소장, 김민석 국무총리,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초청해 오찬을 진행했다.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한 지 1년이 되는 날에 맞춰 입법·사법·행정·헌법재판·선거관리 기관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계엄 사태 1주년의 의미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 대통령은 더 일찍 모셨어야 했다며 늦은 만남에 유감을 표한 뒤, 날짜가 비상계엄 사태 1년이 되는 날과 겹친 점을 언급했다. 이어 오늘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특별한 날이자 시민들의 행동이 시작된 날이라고 규정하며, 우리 모두 헌정질서를 지키는 책임 있는 기관장이라는 점에서 만남의 의미가 각별하다고 말했다. 헌정질서 수호를 각 기관장의 공통된 책무로 못 박은 셈이다.  

 

특히 최근 여권과 갈등을 빚고 있는 조희대 대법원장이 자리를 함께한 점에서 시선이 모였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 중인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대법관 증원, 법원행정처 폐지,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 현안을 둘러싸고 조 대법원장과 여권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돼 왔다.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이 헌법 수호 책무를 강조해 조 대법원장을 포함한 사법부를 향한 메시지를 던졌다는 해석도 뒤따랐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독자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사법제도는 국민의 권리 보호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논의와 공론화 과정을 거쳐 신중하게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어 사법부 판단에 국민 모두가 동의할 수는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개별 재판의 결론은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3심제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충분한 심리와 절차를 거쳐 최종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만큼 현행 사법제도의 정당성과 신뢰가 제도적 장치에서 담보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발언은 이재명 대통령과 우원식 국회의장, 김민석 국무총리 등 행정부·입법부 대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왔다. 정치권 일각에서 추진 중인 내란전담재판부 설치와 대법관 증원, 법원행정처 폐지 등 사법제도 개편 기류에 대해 조 대법원장이 신중한 접근을 주문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3심제를 직접 거론한 대목은 재판소원 도입 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반대로 입법부와 행정부 수장들은 계엄과 내란 관련 재판의 신속한 진행에 수위를 높였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재판이 신속하고 엄정하게 진행돼 국민의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며, 이를 바탕으로 국민 통합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 의장은 비상계엄 해제 의결에 참여한 190명의 의원을 위해 제작한 기억패를 이재명 대통령에게 전달하며 당시 국회의 역할을 환기했다.  

 

김민석 국무총리도 내란 심판 가속화를 촉구했다. 김 총리는 대부분 체포의 대상이었던 우리가 몸 성하게 여기에 있는 것도 국민 덕분이라며, 입법·사법·행정 등 모든 분야에서 내란의 뿌리를 뽑고 나라를 정상화하는 것이 헌법기관의 역사적 소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하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한 시도 자리를 지킬 자격이 없다며 강한 표현을 사용했다. 내란 심판이 지체되며 국민 염려가 커지고 있다며, 오늘 자리에서 헌법기관 모두가 역사적 책임에 대한 결의를 다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헌법재판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각자의 역할을 부각했다. 김상환 헌법재판소장은 충격적인 민주주의·법치주의 침해에 맞선 국민께 감사드린다며, 헌법재판소도 주권자인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본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계엄군의 헌법기관 침탈 행위가 국민께 큰 충격을 줬다고 평가하면서, 전례 없는 혼란 속에서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도 국민주권 실현이라는 헌법적 책무에 소홀함이 없게 하겠다고 다짐하며 선거 관리의 중립성과 책임을 재확인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날 오찬을 두고 복합적인 해석이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의 헌정질서 수호 강조는 비상계엄 사태 1년을 상징화함과 동시에, 향후 계엄·내란 관련 재판과 국회 논의에서 각 기관의 책임을 환기한 메시지로 읽힌다. 동시에 조희대 대법원장이 사법제도 개편에 신중론을 앞세우면서, 사법개혁을 둘러싼 여권과 사법부 간 긴장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향후 국회가 내란전담재판부 설치와 재판소원 도입, 사법행정 구조 개편 등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하면 사법부와의 마찰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크다. 계엄·내란 관련 재판 속도와 방향을 둘러싼 여론 역시 다른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정치권은 이날 오찬에서 드러난 각 기관장의 메시지를 토대로 계엄 사태 후속 정리와 사법제도 개편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다시 격돌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국회는 향후 정기국회와 임시국회에서 계엄·내란 관련 입법과 사법제도 개편 법안을 놓고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며, 정부와 헌법기관들도 헌정질서 수호라는 공동의 명분 아래 각자의 역할을 둘러싼 조정에 나설 전망이다.

이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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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대통령#조희대대법원장#비상계엄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