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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 위로 번지는 겨울빛”…제주 고요한 바다에서 찾은 느린 여행의 시간

정유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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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주를 찾는 이들이 겨울을 기다린다. 예전엔 성수기를 피해 떠나는 차선의 선택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고요한 바다와 텅 빈 길을 즐기려는 이들의 일상이 됐다. 사계절 붐비는 섬이지만, 속도를 조금 늦추면 다른 얼굴의 제주가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 제주의 첫 장면은 제주시 이호일동의 이호테우해수욕장에서 시작된다. 도심과 멀지 않은 해변에 서면 붉은색과 흰색의 말 등대 두 기가 푸른 바다를 향해 나란히 서 있다. 여행객들은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모래사장을 걷거나, 말 등대를 배경 삼아 사진을 남긴다. 여름의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차가운 공기와 낮게 깔린 파도가 남는다. 넓은 주차 공간 덕분에 차를 세우고 잠시 머무르기에도 부담이 없다. 그만큼 겨울 바다의 정취를 조용히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어울리는 풍경이다.

출처=한국관광공사 이호테우해수욕장
출처=한국관광공사 이호테우해수욕장

조금 더 섬의 안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서귀포시 표선면의 제주민속촌에서 완전히 다른 시간이 흐른다. 19세기 제주의 생활상을 재현한 이곳에는 산촌, 중산간촌, 어촌, 토속신앙 마을 등이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다. 초가 지붕 아래 100여 채의 전통 가옥이 줄지어 서 있고, 돌담 사이로 찬 공기가 스며든다. 관람객들은 윷놀이, 투호, 제기차기 같은 민속놀이를 직접 해 보며 어릴 적 기억을 꺼내기도 한다. 초가집 안에 놓인 민화와 도자, 공방에서 이어지는 손작업은 빠르게 변한 제주의 얼굴 뒤에 남아 있는 숨결을 보여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을 주변에 피고 지는 꽃을 따라 걷다 보면, 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옛 제주’를 떠올리는지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제주시 애월읍의 새별오름은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특히 빛난다. 완만한 경사의 오름을 따라 한 걸음씩 오르다 보면, 발끝 아래로 은빛 억새가 바람에 맞춰 물결처럼 흔들린다. 등산 장비를 갖추지 않아도 산책하듯 오를 수 있는 길이라 가족 단위 여행객과 혼자 여행을 떠난 이들 모두 부담 없이 찾는다. 정상에 오르면 오름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과 광활한 초원이 한눈에 펼쳐진다. 주변으로 이어지는 제주의 자연 풍경은 도시의 시간과는 다른 길이를 지닌다. 방문객들은 눈앞의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보다, 한동안 말없이 서서 바람 소리와 억새의 마찰음을 듣곤 한다고 표현한다.

 

서귀포시 안덕면의 본태박물관에서 만나는 제주는 더욱 내향적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 공간은 ‘본래의 모습’을 탐색하는 미학에 집중한다. 노출 콘크리트 벽 위로 햇빛이 비스듬히 떨어지고, 물이 고인 공간 사이로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춘다. 다섯 개 전시관 안에는 피카소, 달리, 백남준 같은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과 한국 전통 공예품이 나란히 놓여 있다. 쿠사마 야요이의 ‘무한 거울방’과 ‘호박’ 작품 앞에 서면, 관람객들은 일상과 전혀 다른 감각에 잠시 휩싸였다고 고백한다. 바다와 억새를 뒤로하고 이곳에 들어온 이들은 “제주에서 가장 조용한 풍경은 실은 실내에 있다”고 느끼곤 한다.

 

이런 변화는 여행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SNS에는 화려한 맛집 인증 대신, 겨울 바다의 수평선이나 새별오름 억새 사이에 선 작은 실루엣을 담은 사진이 늘어나고 있다. 커뮤니티에는 “번화가보다 민속촌 마을 골목이 더 기억에 남았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본태박물관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후기가 이어진다. 여행지에서 무엇을 더 보고 먹을지보다, 어디에서 잠시 멈춰 설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진 셈이다.

 

여행 심리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속도 조절형 여행’이라 부른다. 빠르게 소비하는 관광 대신, 자연과 공간 사이에 스스로를 내려놓는 경험에 가치를 두는 방식이다. 이호테우해수욕장의 차분한 파도, 새별오름의 거친 바람, 제주민속촌의 오래된 지붕, 본태박물관의 정제된 빛은 서로 다른 결을 지녔지만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익숙한 일상에서 잠시 비켜나, 나의 속도를 다시 정하는 시간이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겨울에 가니까 비로소 제주가 들리더라”, “관광지가 아니라 풍경을 보러 간 기분”이라는 고백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억새 사이를 걷던 순간을 떠올리며 “사진에는 잘 담기지 않았는데, 그날의 공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적었다. 또 다른 여행자는 본태박물관을 다녀온 뒤 “작품보다도 건물과 빛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표현했다.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유명 포인트가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정적의 순간이라는 이야기다.

 

제주에서 보내는 겨울은 더 이상 빈 시즌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기 좋은 계절로 자리 잡는 중이다. 붉은 말 등대가 서 있는 해변, 옛 제주의 숨결이 남은 민속촌, 억새 물결이 흐르는 오름, 건축과 예술이 겹쳐지는 박물관 사이를 천천히 옮겨 다니다 보면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거창한 계획이 없어도, 잠시 멈추어 서는 일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정유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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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이호테우해수욕장#본태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