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유전체로 본 한국인 유방암"...삼성, 세계최대 코호트 구축 파장
전장유전체 분석 기술이 한국인 유방암의 정밀 진단과 치료 패러다임을 새로 짜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이 우리나라 유방암 환자 1364명의 전장유전체 분석 데이터와 임상 정보를 결합한 세계 최대 규모의 코호트 큐브릭스를 완성하면서다. 한국인 특유의 유전적 특성이 유방암 발병과 치료 반응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입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 서양 중심으로 설계돼 온 글로벌 유방암 연구와 신약개발 경쟁에도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업계와 의료계에서는 이번 성과가 아시아 정밀의학 시장에서 한국의 데이터 리더십을 강화할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도 나온다.
삼성서울병원은 전장유전체 시퀀싱 WGS을 기반으로 한 유방암 코호트 큐브릭스 구축 성과를 네이처 최근호를 통해 공개했다고 4일 밝혔다. 연구는 삼성서울병원 유방암센터 혈액종양내과 박연희 교수, 유방외과 유종한 교수, 영상의학과 이정민 교수 연구팀이 바이오인포매틱스 기업 이노크라스의 주영석, 김률 박사와 함께 수행했다. 2012년부터 2023년까지 삼성서울병원과 서울성모병원에서 등록한 국내 유방암 환자 1364명을 대상으로 전장유전체 분석을 실시하고, 진료 기록과 예후 정보까지 통합해 정밀 코호트를 구축한 것이 특징이다.

큐브릭스는 기존의 차세대염기서열분석 NGS 패널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유전 정보를 포착하는 전장유전체 시퀀싱을 활용했다. NGS 패널이 특정 유전자 집합과 개별 염기의 작은 변이 포인트 변이에 초점을 맞췄다면, 전장유전체 분석은 유전체 전체의 구조적 이상, 긴 구간 복제수 변이, 복잡한 재배열까지 포괄적으로 파악한다. 암 유전체를 숲과 나무에 비유하면, 패널 검사가 개별 나무의 일부분만 보는 수준이라면 WGS는 계절 변화에 따른 숲 전체의 구조 변화를 장기적으로 관찰하는 방식에 가깝다.
연구팀은 큐브릭스를 통해 후천적 돌연변이 약 1093만 개를 확보하고, 이 가운데 유방암 발병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유전자를 41개로 추렸다. 특히 BCL11B, RREB1, RAF1, SPECC1 등 4개 유전자는 유방암과의 연관성이 처음 보고된 사례로, 향후 진단용 바이오마커나 표적치료제 개발 타깃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주영석 박사는 대규모 임상 코호트와 전장유전체 시퀀싱, 고도화된 바이오인포매틱스 분석이 결합될 때 기존 타깃 패널 검사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인사이트를 발굴할 수 있다며 일상 진료에서 전장유전체 분석 사용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코호트 분석에는 암의 발생 원인과 진행 양상을 정량화하기 위한 다양한 지표가 포함됐다. 먼저 특정 발암 요인의 흔적을 읽어내는 돌연변이 시그니처 분석을 통해 어떤 환경적·내인성 요인이 유방암 유전체를 변형시켜 왔는지 추적했다. 또 DNA 복구 경로 이상을 의미하는 상동재조합 결핍 HRD 상태를 계산해 항암제 반응성을 예측하고, 종양변이부담 TMB를 통해 면역항암제 효과 가능성을 평가했다. 여기에 암 덩어리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유전적 특성의 암세포 비율을 반영한 종양 이질성 지표 MATH를 도입해 예후를 수학적으로 추정하는 모델도 제시했다.
특히 종양 이질성 점수 MATH의 예후 예측 능력은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연구에 따르면 MATH 점수가 중앙값인 40점보다 높은 환자군은 낮은 환자군에 비해 사망 위험이 1.66배 높았다. HER2 양성 유방암 환자에서는 항 HER2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무진행생존율이 2.80배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영국에서 구축된 대표적 유방암 코호트 METABRIC 데이터셋에 MATH 모델을 적용했을 때도 유사한 결과가 도출돼, 서양 환자군에서도 예후 예측 지표로 기능함이 검증됐다. 같은 유방암 진단을 받더라도 환자별 유전체 복잡도에 따라 치료 전략을 보다 촘촘히 차별화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셈이다.
한국인 유방암 환자의 유전적 특성이 서양과 크게 다르다는 점도 큐브릭스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APOBEC3A와 APOBEC3B 유전자의 변이를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비율이 한국인 유방암 환자에서는 31.8%로, 유럽 환자의 8.5% 대비 약 3.7배 높았다. APOBEC3A/3B 변이는 DNA 편집 효소의 기능과 연관된 유전자로, 다른 유전자들의 돌연변이 발생을 촉진해 암 발생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아시아 환자군이 유전적 출발선부터 서양 환자와 다르다는 점을 유전자 수준에서 정량적으로 증명한 사례라고 강조했다.
유방암 발생 시점과 진행 과정에 대한 새로운 가설도 제시됐다. 연구팀은 임상적으로 종양이 발견되기 훨씬 이전 단계에서 이미 주요 유방암 관련 돌연변이들이 축적되기 시작한다는 점을 유전체 분석을 통해 확인했다. 암이 특정 시점에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암세포의 씨앗이 뿌려지는 초기 단계에서 긴 구간 복제수 증폭 long segmental copy number amplifications 같은 구조적 이상이 먼저 발생하고,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추가 돌연변이와 환경적 요인이 더해지며 완전한 유방암으로 발전한다는 흐름이다. 치료 예후가 비교적 좋다고 평가되는 호르몬수용체 양성 유방암에서 수년 이상 장기 재발이 빈번하고, 결국 난치성으로 전환되기도 하는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의료현장에서 널리 사용 중인 표준 패널 기반 NGS 검사가 가진 한계를 실제 데이터로 보여준 점도 큐브릭스의 의미로 꼽힌다. 패널 검사는 미리 선정된 유전자 집합과 단일 염기 수준의 포인트 변이에 집중하다 보니, 유전체 전체의 구조적 변화와 장기적인 종양 진화 패턴을 포착하는 데 제약이 크다. 큐브릭스에서는 전장유전체 데이터를 기반으로 돌연변이 시그니처를 정교하게 재구성해, 같은 분자 아형으로 분류된 유방암이라도 치료 저항성의 차이가 크다는 점을 더 명확히 드러냈다. 이는 환자군을 세분화해 임상시험을 설계하고, 특정 아형 내에서 치료 반응이 좋은 집단을 선별하는 데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연구팀은 특히 HRD를 유방암 치료 성패를 가르는 핵심 지표로 제시했다. HRD는 DNA 이중 가닥 손상 복구 경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며, PARP 억제제 등 특정 표적치료제에 대한 반응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큐브릭스 분석 결과, HRD가 존재하는 여성호르몬수용체 양성 전이성 유방암 환자는 1차 치료로 사용되는 항호르몬요법과 CDK4/6 억제제에 반응하지 않고 병이 진행될 위험이 HRD가 없는 환자 대비 14.7배 높았다. 연구진은 HRD를 포함한 치료 연관 변이를 전장유전체 차원에서 포괄적이면서도 깊이 있게 규명함으로써, 유방암 정밀의학을 실제 임상에 구현할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이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관점에서 보면 큐브릭스는 서양 여성 중심으로 축적돼 온 유방암 유전체 데이터 편중을 완화하는 역할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국제 유방암 연구와 신약개발은 유럽과 북미 환자 데이터를 토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아시아 환자들은 임상 시험 설계와 약물 승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다는 지적이 있었다. 연구팀은 한국인 유전체 특성을 반영한 대형 코호트가 제시됨으로써 아시아 환자를 포함하는 다인종 임상 설계와, 인종별 차이를 고려한 표적치료 전략 수립에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큐브릭스가 향후 글로벌 중개 연구에서 한국을 데이터 허브로 부상시키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책과 산업 측면에서는 고품질 임상·유전체 통합 데이터가 미래 바이오 산업의 핵심 자원이라는 점을 재확인시킨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개인정보 보호와 데이터 활용 규제가 엄격해지는 가운데, 삼성서울병원과 이노크라스의 협력 모델은 병원 내 임상 데이터와 민간 바이오인포매틱스 역량을 결합해 데이터 가치를 극대화하는 하나의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 향후 정부의 국가 바이오 빅데이터 사업, 정밀의료 시범사업 등과 연계될 경우, 국내 제약사와 바이오 벤처가 큐브릭스를 기반으로 신약 타깃 발굴과 환자 선별 전략을 고도화하는 방향도 기대된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박연희 교수는 현재 통용되는 분류 기준만으로는 유방암의 세부 특징과 환자별 치료 결과 차이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며 전장유전체 분석과 임상 데이터를 결합한 코호트가 유방암의 기전을 더 분명히 밝히고, 연구와 치료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큐브릭스가 실제 진료 지침과 보험 제도에 어떻게 반영될지, 나아가 국내 정밀의료와 유전체 기반 신약개발 생태계가 이를 얼마나 빠르게 수용할 수 있을지에 주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