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 뜬 해를 본다”…향일암과 겨울 남도의 느린 여행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화려한 놀이시설보다 마음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풍경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겨울이면 더 깊어지는 남도의 바다와 산, 그 사이에서 천천히 걸으며 나를 돌아보는 여행이 요즘의 일상이 됐다. 사소한 코스 선택 같지만, 그 안에는 달라진 쉼의 태도가 담겨 있다.
요즘 전남을 찾는 이들은 한여름의 바다 대신 겨울 햇살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여수에서는 “동백이 지금 몇 분 만개냐”를 묻는 인증 글이 SNS에 자주 올라온다. 여수시 수정동의 오동도는 그 중심에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시작점으로 불리는 이 작은 섬은 겨울만 되면 붉은 동백꽃으로 섬 전체가 서서히 물든다. 동백나무 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붉은 꽃잎이 눈과 귀를 동시에 붙잡는다. 여행객들은 “꽃 구경을 온 줄 알았는데, 어느새 마음이 조용해졌다”고 종종 표현한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한국관광공사가 공개한 계절별 선호 여행지 조사에 따르면, 겨울철 남도 해안과 섬을 찾는 개별 여행객 비율이 꾸준히 늘어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따뜻한 기온 덕분에 걷기 좋은 날이 많은 데다, 동백꽃과 같은 계절 풍경이 ‘겨울 감성 여행지’로 자리 잡고 있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예전처럼 스키장이나 실내 쇼핑몰로 몰리기보다, 바람이 부는 바닷길을 일부러 택하는 셈이다.
여수 돌산읍의 향일암도 이런 흐름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해를 향한다는 이름처럼 향일암은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찾는 사람들로 겨울마다 잠시 들뜬다.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관음 기도 도량으로 전해지는 이 사찰은 기암절벽 위에 자리해 있다. 굽이굽이 난 계단을 올라 마당에 서면, 수평선 위로 서서히 붉은 해가 떠오른다. 누군가는 두 손을 모으고, 누군가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한 방문객은 “해가 뜨는 장면을 본 것뿐인데, 한 해를 버텨볼 용기가 조금 생겼다”고 고백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새벽 여행을 ‘리셋 의식’으로 읽는다. 한 여행 심리 연구자는 “해돋이 명소를 찾는 마음의 본질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욕구에 가깝다”며 “특히 사찰처럼 고요한 공간에서 맞는 일출은 종교적 색채를 떠나 자기 자신을 응원하는 작은 의식이 되곤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화려한 카운트다운 대신, 다소 불편하더라도 산길과 계단을 올라 바다 위의 해를 만나러 간다.
전남의 풍경 여행은 바다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곡성군 오곡면의 섬진강기차마을에서는 철길을 따라 흐르는 추억을 타는 사람들이 늘었다. 옛 전라선 구간을 활용해 만든 이 기차 테마파크에서 관광용 증기기관차는 섬진강을 따라 천천히 달린다.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어내는 열차 안에서 창밖을 보면,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강변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아이들은 기차 소리에 들떠 있고, 어른들은 “어릴 때 타던 기차 같아 괜히 뭉클하다”고 느낀다. 구 곡성역 구내에는 장미공원과 레일바이크도 있어,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몸을 살짝 움직이며 추억을 더하는 코스로 이어진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여행 커뮤니티에는 “볼거리가 화려한 건 아닌데, 그냥 계속 기억에 남는다”, “아이에게 스마트폰 대신 기차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서 곡성을 골랐다”는 후기들이 쌓인다. 과거의 느린 교통수단이 지금은 새로운 경험이 돼, 온 가족의 감정을 태우는 놀이기구가 된 셈이다.
구례군 산동면의 지리산치즈랜드에서는 풍경 자체가 ‘휴식 프로그램’이 된다. 지리산 자락에 펼쳐진 넓은 초원 위로 바람이 길을 낸다. 방문객들은 목장 울타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멀리 보이는 산 능선을 바라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데, 특히 봄이면 노란 수선화가 언덕을 가득 채워 사진보다 더 그림 같은 장면을 만든다. 이곳은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신선한 유산균 발효 요거트를 판매해 여행객들은 벤치에 앉아 요거트를 한 숟갈 뜨며 “이게 진짜 지리산 맛”이라며 웃곤 한다. 한때 운영되던 치즈 만들기 체험은 중단됐지만, 도심에서 보기 힘든 목장의 여유로운 풍경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휴식 문화 연구자들은 이런 여행지를 향한 선호를 “느린 감각 회복”이라 부른다. 빠르게 소비하고 인증하기 좋은 관광지가 아니라,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고 기다려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을 찾게 된다는 의미다. 오동도의 동백 숲길, 향일암의 계단, 섬진강을 따라가는 느린 열차, 지리산 초원의 바람은 모두 시간을 조금씩 늦추게 만든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풍경을 보러 가는 동시에, 자신의 속도를 조정하러 남도로 향하고 있는 셈이다.
여행을 다녀온 이들은 입을 모은다. “특별한 것을 한 건 없는데, 묵은 마음이 조금 비워졌다”, “해돋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야 비로소 한 해를 보낸 느낌이 들었다”고 표현한다. 누군가는 동백꽃이 떨어진 길을 찍어두고 힘든 날마다 다시 꺼내 보며 버틴다고 말한다. 일상의 피로를 완전히 지워버리진 못하더라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장면 하나를 마음속에 간직하는 방식이다.
향일암에서 떠오르는 해, 오동도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 섬진강을 따라 달리는 증기기관차, 지리산치즈랜드의 초원은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넘어 겨울을 견디는 마음의 버팀목이 돼 준다. 바다와 산, 기차와 목장을 잇는 전남의 여행길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만큼 오래 기억된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 계절 남도로 향하는 발걸음은 어쩌면 누구나 겪고 있는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