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 끝나가고 있다”…트럼프 발언에 러 원유 공급 기대, 국제 유가 급락
현지시각 16일,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 선물시장에서 국제 유가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기대 속 러시아산 원유 공급 확대 가능성이 부각되며 큰 폭으로 떨어졌다. 이번 가격 급락은 이미 공급 과잉이 누적된 시장에 추가 물량이 유입될 수 있다는 전망을 자극해 세계 에너지 시장 전반에 파장을 낳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과 대러시아 제재 완화 속도가 유가 향배를 가를 핵심 변수로 떠오른 상황이다.
현지시각 기준 16일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1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전 거래일보다 2.7% 하락한 배럴당 58.92달러에 마감했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된 1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도 같은 폭인 2.7% 떨어진 배럴당 55.27달러를 기록했다. 두 벤치마크 유종 가격은 모두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수요가 급감했던 2021년 2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며 약 5년 만의 저점을 경신했다.

가격 급락의 직접적인 촉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USA)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각)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질문에 답하면서 전쟁 종결을 위한 합의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다”고 말해 조기 종전 가능성을 거듭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이 발언을 계기로 러시아산 원유 수출을 묶고 있는 각종 제재 조치가 완화될 수 있다는 기대가 부상했다.
다만 유럽연합(EU) 등 유럽(Europe) 측 당국자들은 우크라이나의 영토 문제와 안전보장 장치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종전 협상 타결 전망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 러시아(Russia)의 침공 이후 서방의 대러 제재와 에너지 디커플링을 촉발해 글로벌 원유·가스 시장의 구조를 크게 흔들어 온 핵심 변수였다.
에너지 시장 분석기관들은 우크라이나 관련 협상이 실제 평화 합의로 이어질 경우, 그 시점과 방식에 따라 유가 흐름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에너지 애스펙츠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에 “우크라이나 관련 신속한 평화 합의가 연말·연초처럼 거래량이 적은 시기에 원유 시장의 가장 큰 지정학적 변수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호르헤 레온 리스타드 에너지(경영 본사는 노르웨이 노르게) 지정학 분석 책임자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안이 합의될 경우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는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완화될 여지가 있는 반면, 유럽의 제재는 정치·여론 상황을 감안해 점진적으로 풀릴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미국과 유럽의 제재 완화 속도 차가 러시아산 원유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어느 지역에 우선 유입될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레온 책임자는 또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석유 인프라 공격이 중단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해상에서 장기간 체류 중인 러시아산 원유 재고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복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현실화되면 약 1억7천만 배럴로 추정되는 해상 러시아산 원유의 상당한 분량이 시장에 돌아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같은 전망은 이미 공급이 넘치는 시장에 추가 하방 압력을 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제 유가는 지정학적 요인과 무관하게도 최근 몇 달간 공급 과잉 우려 속에서 약세 흐름을 이어 왔다. 브렌트유 가격은 최근 5개월 연속 하락세를 기록하며 11년 만에 최장 기간 연속 하락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웠고, 올해 들어서만 배럴당 20달러 가까이 떨어졌다. 수요 둔화 우려와 함께 미국, 캐나다(Canada), 브라질(Brazil), 아르헨티나(Argentina) 등 비(非)OPEC 산유국의 증산이 유가 하락 압력을 키웠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이 하루 300만 배럴 증가했다고 밝혔다. IEA는 생산 확대의 배경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뿐 아니라 북미와 남미 산유국들의 공격적인 투자와 증산 전략을 꼽았다. 이 같은 공급 확대는 팬데믹 이후 회복된 수요 증가 속도를 앞지르며 구조적인 공급 과잉 우려를 키운 것으로 해석된다.
IEA는 내년 세계 원유 시장에서 하루 평균 370만 배럴 규모의 공급 과잉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수치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웃도는 사상 최대 규모의 초과 공급으로, 현재 진행 중인 유가 약세가 단기간에 반전되기 어렵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IEA는 보고서에서 “예상되는 공급 과잉이 국제 유가에 상당한 하방 압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국제 주요 매체들도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기대와 공급 구조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러시아산 원유의 시장 복귀 가능성이 “전후 에너지 시장 재편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고, 미국 CNN과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대러시아 제재 완화 속도가 서방의 대러 전략과 나토(NATO) 안보 구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유가 급락이 에너지 수입국에는 단기적으로 비용 절감 효과를 줄 수 있지만, 산유국 재정 악화와 중동·러시아 등 산유국의 정책 불확실성을 키울 수 있다고 우려한다. 산유국들이 재정 수지 방어를 위해 추가 감산이나 가격 방어 전략에 나설 경우, 지정학적 리스크와 맞물려 가격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은 여전히 영토·안보 보장·제재 해제 조건 등을 둘러싸고 복잡한 논의가 진행 중인 만큼, 트럼프 대통령의 낙관론이 실제 합의로 이어질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과 대러시아 제재 완화 수위, 러시아산 원유 공급 재개 속도가 향후 국제 유가와 세계 에너지 질서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