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기증에 DNA 오픈소스까지…두로프, 유산 전략이 던진 파장
메신저 앱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의 파격적인 정자 기증과 유산 배분 계획이 IT 부호의 새로운 생식·상속 모델을 둘러싼 논쟁을 키우고 있다. 고액 자산가가 디지털 플랫폼과 생식 기술, 유전자 정보를 결합해 자녀와 유산 구조를 설계한 드문 사례로, 향후 정자 기증 시장과 유전자 데이터 활용 방식에 적잖은 파장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디지털 시대 부호의 생식·유산 전략이 새로운 바이오 윤리 이슈로 부상하는 분기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3일 두로프의 정자 기증 이력과 유산 계획을 소개하며, 그가 2010년부터 정자 기증을 시작해 현재 최소 12개국에서 100명 이상의 자녀를 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이 숫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세 명의 여성과 사이에서 낳은 6명의 자녀를 제외한 수치다. 두로프는 처음에는 자녀를 원하던 지인을 돕기 위해 기증을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고품질 정자 부족 문제를 해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익명 기증을 이어왔다는 설명이다.

두로프의 정자는 현재 모스크바의 한 난임 클리닉에 냉동 상태로 보관돼 있다. 두로프는 2023년 7월 텔레그램을 통해 해당 정자가 여전히 사용 가능하다고 직접 알렸다. 클리닉 측은 두로프의 정자를 원하는 여성에게 유전적 질환 가능성을 배제한 선별 배아를 제공한다고 강조하고, 체외수정 비용까지 지원하겠다고 홍보해 사실상 두로프의 유명세를 활용한 생식 마케팅에 나선 모습이다.
정자 제공 조건도 명시됐다. 두로프의 정자를 사용하려는 여성은 미혼이면서 만 37세 이해야 한다. 생식의 자유 시장에 IT 억만장자의 유전자가 프리미엄 상품처럼 등장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생식보조기술과 개인 브랜딩이 결합한 이 같은 사례가, 유전자 선택과 상업적 기증을 둘러싼 윤리 논쟁을 더 자극할 수 있다고 본다.
두로프는 상속 구조에 대해서도 기존 부호들과 다른 접근을 택했다. 그는 지난해 여름 프랑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모든 생물학적 자녀에게 상속 지분을 동일하게 나누겠다고 천명했다. 이후 두로프에게 자신이 친자라고 주장하는 연락이 쇄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브스는 그의 순자산을 약 170억 달러, 한화 23조 원 수준으로 추산하며, 대부분의 자산은 비상장 메신저 플랫폼 텔레그램 가치에 기반한다고 평가했다.
두로프는 2023년 10월 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자신과 DNA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설령 30년 후라도 사후 재산 일부를 받을 권리가 생기게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동시에 그는 자녀들이 서로를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의 DNA 정보를 공개 저장소 형태로 개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유전자 데이터의 오픈소스화를 통해 친자 확인과 상속 자격 인증을 결합하겠다는 구상에 가깝다.
정자 기증으로 태어난 100명 이상의 자녀도 예외가 아니다. 두로프는 이들에게도 동일한 상속 원칙을 적용하되, 자녀들이 최소 30년 동안은 자신의 재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두겠다는 입장이다. 어린 나이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재산을 탕진하거나 삶의 동기를 잃는 부작용을 막겠다는 취지다. 두로프는 아이들이 통장에 기댄 삶이 아니라, 평범한 환경에서 스스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두로프의 개인적 선택을 둘러싼 논쟁은 만만치 않다. 그는 2023년과 2024년 두 차례에 걸쳐 파트너들로부터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사 고소를 당했다. 한 3세 자녀에 대한 학대 의혹도 제기됐다. IT 부호의 미래지향적 유전자·상속 전략과, 실제 가정사에서 드러난 책임 회피 논란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목이다.
생식의학과 법조계에서는 두로프 사례를 두고 여러 쟁점이 제기된다. 해외 거주 자녀와 상속권을 어떻게 확인하고 집행할 것인지, 정자 기증을 통해 태어난 자녀의 법적 지위와 상속 비율을 각국이 어떻게 인정할 것인지가 핵심 쟁점으로 꼽힌다. 특히 다국적 플랫폼 창업자의 재산이 여러 국가에 분산돼 있고, 자녀 또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만큼 각국 상속법과 친자 확인 절차가 크게 충돌할 여지도 있다.
유전자 데이터 활용 측면에서도 새로운 질문이 나온다. DNA를 공개해 자녀들이 서로를 찾도록 한다는 구상은, 혈연 관계 확인이라는 긍정적 기능과 함께 유전자 정보의 과도한 노출, 제삼자에 의한 오남용 우려를 동시에 낳는다. 일부 국가는 유전자 정보의 상업적 활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 실제 DNA 오픈소스 계획이 법적 장벽에 부딪힐 가능성도 있다.
전문가들은 텔레그램 창업자의 사례가 IT 부호 개인의 기행으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디지털 플랫폼과 생식보조기술, 유전자 분석 서비스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빠르게 대중화되는 상황에서, 고액 자산가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브랜드화하고, 유전자와 연동된 상속 구조를 설계하는 시도가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산업계는 두로프의 실험이 실제 제도권 속에서 어떻게 평가되고 조정될지 주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