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혁명 1주년"…이재명, 계엄 선포 장소서 헌정질서 수호 강조
정치적 격돌의 상징이 된 12월 3일을 두고 이재명 대통령과 윤석열 전 대통령의 운명이 교차했다. 비상계엄 선포 1년을 맞은 이 대통령은 계엄이 선포됐던 바로 그 자리에서 대국민 특별성명을 읽어 내려가며 헌정질서를 지켜낸 국민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했다. 동시에 이른바 내란 청산과 제도 개혁 완수를 향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 대통령은 3일 오전 9시 서울 용산 대통령실 1층 브리핑룸 연단에 섰다. 비서실장, 국가안보실장, 정책실장을 대동한 그는 먹색 정장에 줄무늬 넥타이를 맨 채 안경을 한 차례 고쳐 쓴 뒤 차분한 표정으로 연설문을 펼쳤다. 그 뒤로 짙은 남색 커튼과 태극기, 봉황기가 보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밤 10시 25분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와 같은 장소, 같은 배경이다.

이 대통령은 약 2천600자 분량의 성명에서 지난해 12월 3일을 “빛의 혁명이 시작된 날”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 표현을 일곱 차례 반복하며 “헌정질서를 짓밟으려 한 시도에 대한 단호한 심판이었고, 국민 주권을 되찾아온 역사의 분기점”이라는 취지로 의미를 부여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이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 직후 계엄 해제 의결을 위해 국회 담장을 넘는 강행군을 주도했다.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며 정권 교체를 완성했다. 반면 윤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됐고, 불법 계엄 시도라는 정치적·법적 책임 논란 속에 몰락했다.
이 대통령은 성명에서 국민을 향해 여러 차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암흑시대로 돌아갈 뻔했던 대한민국에 다시 빛을 되찾아 주셨다”며 “대한국민이 없었다면 헌정질서 회복도, 오늘의 이 자리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저들은 크게 불의했지만 우리 국민은 더없이 정의로웠다”고 강조하며 계엄 저지 과정에 나섰던 시민들을 일일이 호명했다.
특히 헌법 전문에 나오는 ‘대한국민’이라는 표현을 여덟 차례 반복해 사용했다. 헌법재판소가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이라는 문구를 인용하며 주권자의 결단을 상기한 점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실은 이날 메시지를 ‘담화’가 아닌 ‘성명’으로 규정했다. 윤 전 대통령이 당시 ‘대국민 담화’ 형식을 통해 계엄을 선포했던 전례와 대비하며, 헌정질서 수호 의지를 분명히 하려 한 셈이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성명 발표 뒤에는 30분간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대통령실은 애초 두세 개 질문만 받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이 대통령이 “더 하시라”고 말하며 질문 수를 늘렸다. 결과적으로 국내외 기자단의 질문은 열 개까지 이어졌다. 형식 면에서 보다 열린 소통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 대통령은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장외집회 참석 배경에 관한 질문을 받고 “역사적 순간에 참여하고 싶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조용히 참석해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호 문제 때문에 참모들이 안 된다고 말려서 몰래 갈 생각”이라고 말해 현장을 웃게 만들었다. 대통령이 계엄 사태 관련 집회에 직접 발을 들이는 것에 대해 정치권 안팎에선 평가가 엇갈리고 있으나, 이 대통령은 시민과의 직접 교감을 중시하는 행보를 이어가겠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이날 오후 이 대통령은 곧바로 청와대 영빈관으로 자리를 옮겨 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80분간 단독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대통령이 국내 언론과 분리해 외신만을 상대로 정식 기자회견을 연 것은 처음이다. 대통령실은 과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현대사의 고비마다 외신이 한국 내부 상황을 기록하고 세계에 알린 역할을 한 데 대한 감사의 뜻이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외신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이른바 K-민주주의를 집중 부각했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집단지성에 의한 평화적이고 아름다운 직접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이어 “아테네는 먼 이상 속에 있지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당장 있는 현실적 모범”이라고 말하며 민주주의 선진국 이미지를 강조했다. 비상계엄 사태 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촛불 집회, 국회 의결,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등 제도와 시민 참여의 결합 구조를 국제사회에 알리려는 의도가 담긴 언급으로 해석된다.
정치권에선 이 대통령의 메시지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여권 일각에서는 계엄 사태를 반복 소환하는 행보가 정치적 편 가르기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반면 야권은 헌정 파괴 시도 재발을 막기 위한 제도 개혁과 책임 규명이 아직 미완이라며 대통령의 강경한 어조에 힘을 싣는 분위기다. 특히 내란 관련 사법 처리, 군 지휘체계 개편, 비상조치 발동 요건 강화 등 후속 입법 논의와도 맞물려 여야 공방이 한층 거세질 전망이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계엄 사태 1년을 계기로 헌법 수호 장치를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는 제언이 잇따른다. 헌법학계 일각에선 국회의 계엄 해제 권한을 실질화하기 위한 절차적 보완, 대통령 비상권 심사 기준 명확화, 군 통수권과 정치적 중립성 간 경계 재정립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촛불 집회에 참여했던 시민단체들은 이날도 도심 곳곳에서 집회를 열고 내란 시도 관련자 엄정 처벌과 민주주의 후퇴 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이 ‘빛의 혁명’이라는 상징어를 전면에 내세운 만큼 향후 국정 운영에도 계엄 사태 기억을 축으로 한 개혁 드라이브가 이어질 전망이다. 정부는 내란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군·치안 시스템 개편, 비상권 통제 장치 강화를 포함한 입법 과제를 순차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국회 역시 계엄·비상조치 제도 개선 법안을 놓고 다음 회기에서 본격 논의에 나설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