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속 의대증원 정책 논란”…서울시의사회, 책임자 처벌 요구 확산
의사 인력 수급을 둘러싼 정책 혼선이 보건의료 산업 전반의 신뢰를 흔들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의과대학 정원 2000명 증원 과정에서 수요 추계와 절차 전반에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가 나오면서, 의료계는 의료 인력 정책을 “데이터 기반의 장기 전략”으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번 사안을 차기 보건의료 인력 설계와 디지털 헬스케어, 필수의료 인프라 재편 경쟁의 분기점으로 보는 시각도 나온다.
서울특별시의사회는 28일 성명을 통해 감사원 감사 결과를 거론하며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의 책임을 전 정부에 돌렸다. 서울시의사회는 의정갈등과 의료현장의 혼란이 “근거 없는 대규모 증원 방침에서 비롯됐다”고 규정하고, 의료농단 사태를 초래한 정책 결정자에 대한 법적·행정적 책임을 요구했다.

전날 공개된 감사원 보고서는 윤석열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이 수요 추계부터 대학별 정원 배정 단계까지 전 과정에 설계 미비와 절차적 흠결이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정부가 정책 추진의 핵심 근거로 제시한 ‘향후 의사 1만5000명 부족’ 전망에 대해 감사원은 과학적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인구 고령화 속도, 질병 구조 변화, 의료이용 패턴, 원격의료·디지털 헬스 기술 확산 등 구조적 변수들이 정교하게 반영되지 않고, 단순 산술 합산에 치우친 결과 과장된 수치가 도출됐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특히 2000명이라는 증원 목표치가 장기 인력 수급 모델을 기반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사전 설정된 정치적 목표를 맞추기 위한 역산에 가까웠다고 비판했다. 의료 인력 정책이 보건의료 데이터와 인공지능 기반 수요 예측 도구를 활용하는 글로벌 흐름과 달리, 기초 통계 수준에 머무른 채 설정됐다는 지적도 함께 제기됐다.
정책 결정 절차의 정당성 훼손도 문제로 지목됐다. 감사원에 따르면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를 굳히는 과정에서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한 협의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해관계자의 의견 수렴과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사실상 생략한 채, 단기간에 대규모 증원 방침을 확정하면서 현장의 반발을 증폭시켰다는 평가다.
대학별 정원 배정을 심의한 위원회 구성도 도마에 올랐다. 교육 여건, 임상 실습 인프라, 교수진의 실제 교육·진료 경험 등 핵심 지표를 반영할 수 있는 전문가 비중이 충분하지 않았고, 각 대학의 인력·시설을 직접 점검하는 절차도 미흡했다는 것이 감사원 판단이다. 의료질과 교육 역량을 고려한 정밀 배분보다는, 지역·정치적 안배가 우선시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의료계에서 나온다.
서울시의사회는 이번 감사 결과가 “의사 부족을 명분으로 한 증원 정책이 실상 ‘의사 수 확보 쇼’에 불과했다는 점을 재확인시켰다”고 주장했다. 의대 정원 조정은 단순 숫자 확대가 아니라, 교육 질과 수련 체계, 지역 의료 인프라, 필수의료 유지, 국민 건강권, 나아가 디지털 헬스케어 전환 속도까지 좌우하는 복합 정책인데, 이를 졸속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서울시의사회는 2000명 증원 발표 이후 대규모 집단행동과 전공의 이탈, 필수과 공백 등 의정갈등이 장기화되며 의료 시스템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흔들렸다고 평가했다. 특히 중증·응급·분만 영역에서 인력 재배치가 지연되고, 병원 현장의 IT·의료정보 시스템까지 비상 운영체제로 전환되면서 환자와 의료진 모두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정책 추진 과정에서 부정확한 수요 추계와 과도한 위기 프레임을 반복적으로 제시한 책임자로 박민수 전 보건복지부 차관을 직접 거론했다. 서울시의사회는 당시 정책 실무 책임자들에 대해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촉구하며, 향후 유사한 보건의료 인력 정책 수립 시 공직자 책임 규율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시의사회가 제시한 대안의 핵심은 과학적 예측 모델을 활용한 장기 수급 설계다. 구체적으로는 의사 수요·공급을 의료 빅데이터, 인구구조, 질환별 유병률, 의료기술 발전 속도, 인공지능 진단 시스템 도입률 등 변수를 포함한 정량 모델로 추정한 뒤, 단계적 정원 조정을 하는 방식이 제안됐다. 디지털 치료제, 원격 모니터링, 병원 정보시스템 고도화에 따라 진료 패턴이 바뀌는 점도 인력 수요 계산에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서울시의사회는 지역·필수의료 강화를 정원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순히 의사 총량을 늘리는 대신, 필수과와 지방 의료기관에서 실제 근무할 인력을 어떻게 유인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련 체계 개편, 지역근무 인센티브, 원격협진 인프라 확대 등 다양한 인력 배치 전략을 패키지로 묶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육 여건 중심의 정원 배정도 요구 사항에 포함됐다. 서울시의사회는 의대별 교수진 확보 수준, 임상 실습 병상, 시뮬레이션 교육 장비, 의료 AI·디지털 헬스 교육 인프라 등 객관적 지표를 기준으로 정원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 역량을 넘어선 무리한 증원은 의료 질 저하와 환자 안전 문제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 인력 배치의 효율성도 주요 과제로 지목됐다. 전공과별 쏠림 현상, 대형병원 집중, IT 인프라 격차 등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수치상 증원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장의 의사 부족 체감은 개선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다. 서울시의사회는 의료 인력 배치 전략 수립 과정에 의료계와 환자단체, 지역사회, 보건경제학자 등을 포함한 다자 참여 구조를 제안했다.
동시에 서울시의사회는 의대 정원 증원 정책 책임자에 대한 명확한 처벌과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공공 정책 설계 과정에서 데이터 조작이나 기초 통계 왜곡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건의료 수요 추계에 대한 독립적 검증 기구를 두자는 의견도 의료계 일각에서 제기된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미국과 영국, 일본 등도 의사 인력 부족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정원 확대와 함께 디지털 헬스케어 도입, 팀 기반 진료 확대, 간호사와 진료보조 인력 역할 재설계 등 복합 처방을 병행하는 추세다. 국내에서 의대 증원 논의가 다시 시작될 경우, 단순 정원 확대가 아니라 헬스케어 산업 구조 전체를 재설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이다.
서울시의사회는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보건의료정책은 현장 의료계와 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의료계와 정부, 시민사회가 데이터를 공유하고 투명하게 논쟁하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의대 정원 정책이 반복적으로 정치 쟁점으로 소비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산업계와 의료계에서는 의사 인력 정책이 실제 시장에 안착해 지속 가능한 의료 체계를 뒷받침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