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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극화 피하는 제약 없다…중국·인도 부상에 미국도 재편

신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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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이 미국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다극화 국면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의 제조업 리쇼어링과 약가 압박, 연구개발 예산 축소가 기존 패러다임을 흔드는 가운데, 중국과 인도가 임상시험과 혁신 허브로 급부상하면서 권력 중심이 다중화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업계에서는 전통 선진국 중심의 의약품 가치사슬이 구조적으로 재편되는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헬스케어 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는 보고서 Nine for 2026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의 대전환에서 지난 20년간 유지돼온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으며 내년이 산업 재편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특히 미국 행정부 정책 변화와 중국·인도의 위상 강화, 인공지능 확산을 산업 구조를 바꾸는 핵심 축으로 꼽았다.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글로벌 톱20 제약사 중 70퍼센트가 미국 내 제조시설 투자를 공식화했다. 트럼프 취임 이후 집계된 누적 공약액은 약 5천억 달러를 넘어섰다. 제조업 리쇼어링 기조와 맞물려 미국 내 설비 증설이 가속하는 반면, 중국과 아시아, 유럽, 중남미 등지에 대한 설비 투자는 정체 국면에 들어선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보고서는 공개된 투자 중 상당 부분이 기존 계획을 재포장한 것이거나 정책 신호를 의식한 상징적 발표에 그칠 위험도 있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의 약가 정책 변화도 글로벌 가치사슬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보고서는 미국의 MFN 최혜국 대우 가격 정책이 다국적 제약사의 글로벌 가격 전략을 재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과의 제로 관세 협상은 미국 이외 국가들에 가격 상향 압력이 전가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사례로 언급됐다. 한국을 포함해 참조가격 시스템을 운영하는 국가들은 상대국 약가 체계와 연동된 구조를 갖고 있어 제도 프레임워크 재협상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신약 혁신 생태계에 대한 위험 신호도 구체적 수치로 제시됐다. 내년도 미국 국립보건원 예산안에는 전년 대비 39퍼센트, 약 180억 달러를 줄이는 감축 계획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각광받았던 mRNA 기술 관련 약 5억 달러 규모 계약이 종료되고, 관련 그랜트 3억5천만 달러 이상이 취소된 상황이다. 보고서는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식품의약국이 승인한 신약 356개 중 354개가 NIH 지원을 받았다는 선행 연구를 인용하면서, 이번 예산 축소가 향후 10년 신약 파이프라인에 구조적인 리스크를 남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대로 중국과 인도는 제조 기지에서 혁신 전진기지로 포지션 전환을 시도하며 존재감을 키우는 모습이다. 아이큐비아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에 본사를 둔 기업이 개시한 임상시험 수는 처음으로 미국을 추월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중국 기업이 체결한 글로벌 파트너십 규모는 485억 달러로 집계됐으며, 이는 2024년 전체 파트너십 실적과 비교해도 8퍼센트 증가한 수준이다. 보고서는 중국이 다국적사와의 공동개발, 라이선스 아웃을 통해 글로벌 신약 공급망에서 협력과 경쟁을 동시에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풀이했다.

 

인도 역시 제네릭 제조 허브에서 혁신 허브로의 전환 속도를 높이고 있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임상시험 점유율 변화를 보면 인도는 109퍼센트포인트 증가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중국은 28퍼센트포인트 증가에 그친 반면, 미국은 1퍼센트포인트 증가에 머물렀고 유럽 4개국 합산은 12퍼센트포인트 감소, 영국은 40퍼센트포인트 감소, 일본은 53퍼센트포인트 감소를 나타냈다. 전통적 선진국이 차지하던 임상시험 수행의 무게 중심이 인도와 중국 같은 신흥국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아이큐비아는 이러한 흐름을 단순한 생산기지 이전이 아니라 연구개발 단계 구도 자체의 재편으로 해석했다. 혁신 신약 후보물질 탐색과 초기 임상 설계, 글로벌 공동 임상 운영이 중국과 인도에서 병행되는 사례가 늘면서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구축돼 있던 임상시험 네트워크가 다극 구조로 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양국에서 의료인과 연구자 풀, 병원 네트워크가 빠르게 확장되면서 제약사는 비용 효율성과 모집 속도, 환자 다양성 측면에서 새로운 선택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보고서는 또 의료인 인게이지먼트와 임상개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요인으로 인공지능 확산을 짚었다. AI 기반 환자 모집 최적화, 전자 의료기록 분석을 통한 적응증 탐색, 시뮬레이션 기반 개발 전략 수립 등이 글로벌 제약사의 표준 도구로 자리 잡으면서, 어느 국가가 더 풍부하고 질 높은 헬스케어 데이터를 제공하느냐가 혁신 허브 경쟁의 핵심 변수가 되고 있다는 평가다. 중국과 인도는 인구 규모와 디지털 헬스 인프라 확충 속도를 바탕으로 데이터 기반 경쟁에서 우위를 노리고 있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국가별 정책과 규제 차이도 다극화 양상을 가속하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미국은 약가 인하와 PBM 투명성 강화, 제조 리쇼어링을 통해 자국 내 접근성과 산업 기반 유지에 방점을 두는 반면, 중국과 인도는 임상·허가 절차 간소화, 세제 혜택, 해외 파트너십 인센티브를 동원해 글로벌 개발 프로젝트 유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보고서는 미국 중심 규제 프레임에 의존해온 다국적 제약사가 각 지역별 규제 리스크와 인센티브 구조를 세분화해 재설계할 시점에 왔다고 지적했다.

 

아이큐비아는 미국 중심 질서의 재편, 중국·인도의 혁신 허브 부상, AI 확산에 따른 의료인 인게이지먼트와 임상개발 구조 변화가 일시적 트렌드가 아니라 산업 구조를 재편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제약바이오 기업이 이 흐름을 기회로 활용할지, 비용과 리스크 확대 요인으로 남길지는 지금 어떤 지역과 파트너십, 기술에 자원을 배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분석했다. 산업계는 다극화된 헬스케어 질서 속에서 자사의 포지셔닝 전략이 실제 시장 안착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시하는 분위기다.

신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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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큐비아#중국헬스케어#인도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