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치료제 급여화 논의 확산…정부 검토에 업계 촉각
비만치료제의 건강보험 급여화 논의가 정치권과 정책 현장에서 본격 거론되면서 공적 관리 체계 편입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비만이 200개가 넘는 합병증을 동반하는 대표적 만성질환으로 재정·산업·의료체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치료 접근성을 개별 소비 여력에만 맡길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업계와 의료계는 이번 논의가 비만을 둘러싼 진료·보험 구조를 재설계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위절제술 등 일부 수술적 치료를 제외한 대다수 비만 진료와 약물 치료는 비급여 영역에 머물러 있다. 체질량지수에 따라 명확히 질환 단계가 구분되고, 심혈관질환과 당뇨병, 지방간, 신장질환 등으로 이어지는 고위험군이 존재함에도, 실제 진료 현장에서는 미용 목적 시술과 동일한 급여 체계 바깥에서 관리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의학적 필요도와 상관없이 경제적 여력에 따라 약제 접근성이 갈리는 구조가 고착돼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변곡점은 정권 차원에서 나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16일 보건복지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탈모와 더불어 비만 치료제의 보험 급여 적용 검토를 주문했다. 특히 청년층이 보험 혜택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상징적 과제로 비만과 탈모를 함께 언급하며,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논의를 공식 의제로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현재 고도 비만 등 의학적 위중도가 높은 일부 환자에게만 제한적 급여가 이뤄지고 있다며, 약제 급여 범위와 기준은 별도 검토가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제약바이오 업계에서는 이미 비만과 당뇨 경계를 넘나드는 신약들이 보험 등재의 첫 관문을 통과하며 정책 환경 변화에 맞춰 포지셔닝을 넓히는 모습이다. 노보 노디스크의 비만 치료제 위고비와 동일 성분인 당뇨병 치료제 오젬픽은 지난 10월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급여 적정성을 인정받았다. 일라이 릴리의 비만 치료제 마운자로 역시 당뇨병 치료 적응증으로 이달 약제급여평가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두 약제 모두 위장관호르몬을 모방하거나 복합 작용시키는 기전으로 식욕과 혈당을 동시에 조절하는 계열로, 기존 경구 약물 대비 체중 감소와 심혈관 보호 효과가 뚜렷하다는 근거가 축적되고 있다.
이들 약제는 앞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과의 약가 협상,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실제 급여 등재 여부와 급여 범위가 결정된다. 현재는 당뇨병 치료 적응증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비만 적응증으로의 확대 여부가 중장기적으로 최대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같은 성분이더라도 적응증에 따라 투약 기간, 용량, 치료 목표가 달라지기 때문에 건강보험 재정과 비용 효과성 평가에서 서로 다른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의료계는 비만치료제 급여화 논의를 단순한 약가 지원 문제가 아니라, 질환 인식과 진료 체계 재편의 문제로 해석하고 있다. 남가은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제약산업 리포트 NEXT PHARMA KOREA를 통해 비만치료제 급여화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남 교수는 세마글루티드와 터제파타이드가 기존 약제 대비 월등한 체중 감량과 심혈관질환 예방 효과를 입증했을 뿐 아니라, 비알코올성 지방간과 만성 신장질환 개선 신호도 보고되고 있다고 짚었다. 다만 이러한 성과가 국내에서는 시장 중심 혁신에만 머무르고 있어, 공적 조정자 역할이 부재하다고 비판했다.
실제 위고비가 국내에 처음 도입됐을 당시 비대면 진료 플랫폼을 통한 처방이 급증했고, 식욕억제제와 병용하거나, 고위험군이 아닌 일반인의 단기 체중 감량 목적 사용이 확산되면서 오남용 논란이 커졌다. 남 교수는 비만 진료를 전면 비급여로 둔 채 시장 자율에만 맡긴 것이 구조적 실패라고 지적하며, 건강보험이 치료 기준과 대상, 모니터링 방식을 설계하는 조정자 기능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특히 급여 부재가 오히려 과잉 처방과 비의학적 사용을 자극하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남 교수는 비만치료제 급여화는 약값을 보조하는 재정 지원 차원을 넘어, 국가가 비만을 질병으로 공식 인정하고 공적 관리 체계 안에서 진단과 치료, 추적 관리를 설계하겠다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급여 기준을 통해 체질량지수와 동반 질환, 치료 실패 경험 등을 객관화하면, 실제 고위험군에게 자원이 우선 배분되고 비대면 플랫폼을 통한 무분별한 처방도 상당 부분 제어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해외에서는 이미 고위험 비만 환자를 대상으로 한 단계적 급여화가 진행 중이다. 영국 국립보건임상평가위원회는 지난해 터제파타이드를 비만 치료제로 평가 승인했고, 영국 국가보건서비스 잉글랜드는 올해 6월부터 임상적 필요도가 높은 환자군을 선별해 단계적 급여 적용을 시작했다. 체질량지수와 합병증, 기존 치료 실패 여부를 세부적으로 반영해, 고위험군 중심으로 공적 자원을 투입하는 구조다. 일본 후생노동성도 지난해 2월 세마글루타이드를 건강보험 급여 항목에 포함했다. 일본은 체질량지수 35 이상이거나 체질량지수 27 이상이면서 동반질환 2개 이상인 경우로 급여 대상을 제한하고, 반드시 전문의 처방과 정기 평가를 거치도록 설계했다.
이 같은 사례는 비만치료제 급여화가 전 국민 무제한 지원이 아니라, 의료적 필요도와 비용 효과성을 반영한 선별 급여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역시 일정 체질량지수 이상이면서 당뇨병, 심혈관질환, 지방간 등 고위험 합병증을 동반한 환자를 우선 대상으로 설정하고, 일정 기간 내 체중 감소나 대사 지표 개선이 없으면 급여 중단을 검토하는 성과 기반 구조 도입을 검토할 여지가 있다.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관리하면서도, 가장 위험도가 큰 환자군에 집중 투자하는 방식이다.
제도 정비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대한비만학회 총무이사인 이재혁 명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학회가 정부에 비만 치료 급여 적용 필요성을 지속 제기해 왔다고 밝혔다. 동시에 비만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종합 관리하기 위한 비만기본법 제정을 추진해 국회 상임위에 상정한 상태라고 전했다. 법안에는 비만 예방 교육부터 진단, 치료, 재활, 직장 및 지역사회 환경 개선에 이르는 전주기 관리 체계 마련이 담겼다.
이 교수는 대통령 발언으로 정책 방향성이 제시된 만큼, 보건복지부가 구체적 로드맵과 급여 기준 설계에 나설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재정 여건을 감안해 선별적인 환자군부터 급여 기회를 넓히는 단계적 접근이 현실적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청년 고도 비만 환자나 심혈관질환 고위험군 등에서부터 시범 급여를 시행해 실제 합병증 감소 효과와 재정 영향 등을 데이터로 검증한 뒤, 대상과 범위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전략이 거론된다.
향후 관건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급여 기준 설정과, 디지털 헬스·비대면 진료 환경에서의 처방 관리 체계 구축이 될 전망이다. 체질량지수와 혈당, 혈압, 지방간 지표 등 임상 정보를 전자 차트와 연동해 지속 평가하고, 비대면 플랫폼에서도 동일한 기준으로 처방과 모니터링을 시행할 수 있도록 표준을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비만치료제 급여화 여부가 향후 비만·대사질환 치료제 개발 전략과 보험 등재 전략을 좌우할 변수로 보고 있다.
국내외 사례를 종합하면 비만치료제의 공적 급여화는 비만을 미용이나 생활 습관 문제가 아닌, 관리 가능한 만성 대사질환으로 재정의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고가 신약의 도입이 단기 재정 부담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지만, 의료계는 장기적으로 합병증 발생을 줄여 전체 건강보험 재정을 절감하고 제도 지속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산업계와 의료계, 정부가 어떤 기준과 속도로 비만치료제 급여화를 설계할지에 따라, 향후 비만 관리 패러다임과 제약·바이오 산업의 방향성도 상당 부분 달라질 수 있어 산업계는 향후 논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