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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바다 위 돌성, 통영 겨울 바람”…조용한 남해에서 찾는 계절의 취향 여행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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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눈 쌓인 설경보다, 나만의 속도로 걸을 수 있는 조용한 길과 가볍게 몸을 깨우는 액티비티를 함께 찾는 사람이 늘었다. 남해를 품은 경남은 겨울에도 그런 욕구를 채워 줄 사찰과 성벽, 루지 트랙을 한 번에 품은 계절 여행지로 불린다.

 

요즘 SNS에는 거제 매미성의 석벽과 통영 루지 헬멧 인증샷이 자주 올라온다. 사람들은 한파를 뚫고도 남해 바다 앞에 서고, 트랙 위를 달린 뒤 따뜻한 국물 한 그릇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조용한 사찰을 거닐다가도 오후에는 경쾌한 바퀴 소리를 택하는 식의 하루 구성이다. 정적인 풍경과 역동적인 체험을 같은 날 안에 담으려는 움직임이다.

출처=한국관광공사 매미성
출처=한국관광공사 매미성

양산 통도사는 그 여정의 시작점이 되기 좋다. 양산시 하북면의 산자락에 기대 선 통도사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로 알려져 있다.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뒤로 계율의 근본도량 역할을 이어왔고, 금강계단은 지금도 그 정신을 품고 있다. 겨울 통도사는 색을 과시하지 않는다. 돌담 위로 마른 나뭇가지만 드문드문 서 있고, 숨을 고르듯 천천히 걷는 발걸음만이 경내를 채운다. 가지런한 석탑과 단단한 기둥을 세운 대웅전은 찬 공기 속에서도 묵직한 온기를 전하는 풍경으로 기억된다.

 

이런 차분함은 지리산 방향으로 더 깊어진다. 하동군 청암면에 자리한 삼성궁은 고조선 시대 제의 공간인 소도를 현대적으로 복원한 곳이다. 환인과 환웅, 단군을 모시는 이곳에는 1000개가 넘는 솟대가 하늘로 치솟아 있다. 겨울 하늘과 맞닿은 나무 기둥들이 바람에 미세하게 떨릴 때, 방문객들은 마치 오래된 신화 속에 발을 들인 듯한 기분을 표현한다. 돌과 나무로 지은 건축물, 토굴과 연못, 전통 찻집 아사달로 이어지는 길에는 맷돌과 다듬잇돌이 놓여 있다. 거친 질감의 돌을 밟으며 걷다 보면, 도시의 속도가 발에서부터 천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따라온다.

 

이런 변화는 여행 패턴에서도 드러난다. 한 지역을 빠르게 훑기보다 한두 군데를 골라, 사색과 체험을 균형 있게 나누는 방식이 일반화되는 분위기다. 하루 종일 사진만 남기던 여행에서, 조용히 머무는 시간과 몸을 쓰는 시간을 함께 배분하며 나만의 리듬을 찾는 식이다. 경남의 겨울 코스는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례로 자주 회자된다.

 

거제시 장목면의 매미성은 그런 흐름 속에서 특히 눈에 띄는 장소다. 자연재해로 파괴된 자리를 한 개인이 스스로 쌓아 올린 돌성이라는 사연은, 보는 이에게 이미 한 번 마음을 멈추게 한다. 바다와 맞닿아 선 석벽은 거대한 요새라기보다 바람을 막아 주는 한 겹의 의지처럼 느껴진다. 비슷한 돌들이 촘촘히 쌓인 성벽 사이로 푸른 남해가 길게 펼쳐지고, 기암괴석이 수평선과 맞물리며 이국적인 풍광을 만든다. 겨울에는 공기가 더 맑아져,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이 한층 또렷하다. 바다를 향해 열린 시야는 일상의 답답함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방문객들은 “그냥 섰을 뿐인데 마음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하곤 한다.

 

통영으로 내려가면 분위기는 또 달라진다. 통영시 도남동의 스카이라인루지 통영은 가족, 연인, 친구 누구와 와도 웃음이 먼저 터지는 공간이다. 리프트를 타고 천천히 언덕 위로 올라가면, 눈 아래로 통영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헬멧을 쓰고 간단한 안전 교육을 마친 뒤 루지에 몸을 싣는 순간, 눈앞에는 구불구불한 트랙이 기다리고 있다. 코스는 다양해 처음 타는 사람부터 속도에 익숙한 사람까지 각자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르며 내려오는 동안 바퀴가 노면을 타고 흐르는 진동과 속도감이 몸을 깨운다. 바다를 옆에 두고 내려가는 루지는 스릴과 풍경을 한 번에 누릴 수 있는 체험으로 회자된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여행 커뮤니티에는 “아침에는 통도사에서 차분히 걸으며 마음을 다독이고, 오후에는 루지 타고 소리를 지르니 하루가 꽉 찼다”, “매미성에서 해 질 녘까지 멍하니 서 있다가 통영에서 저녁을 먹었다”는 후기가 이어진다. 예전처럼 빽빽한 일정 대신, 하루에 두세 곳만 천천히 둘러보며 장면 하나를 오래 붙드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이 여유를 ‘나이 듦’이 아니라 ‘취향의 성장’이라고 표현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삶의 속도를 조절하려는 시도로 바라본다. 쉼 없이 달려온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는 통도사 같은 사찰에서 자신의 호흡을 다시 세고, 또 다른 누군가는 루지 트랙에서 몸의 리듬을 새로 기억하는 식이다. 한 명이 쌓아 올린 매미성의 돌벽을 바라보며 “나도 나만의 성벽을 쌓아 보겠다”는 다짐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겨울 여행지에서 마주한 풍경이 단지 사진 속 배경을 넘어, ‘어떻게 나답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번지는 순간이다.

 

경남의 겨울은 화려한 눈 축제 대신, 묵묵히 서 있는 석벽과 천천히 내려오는 루지, 차가운 공기 속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채워진다. 사찰과 성곽, 액티비티를 오가며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계절을 통과하고 있다. 작고 사소한 여행 코스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지금 남해의 겨울을 찾는 움직임은, 누구나 한 번쯤 겪고 있는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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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매미성#스카이라인루지통영#통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