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AI 전략협력 가속 예고…공급망 넘어 공동혁신 구상
인공지능이 제조와 서비스, 의료와 모빌리티까지 산업 전반의 구조를 재편하는 가운데 한국과 중국이 단순 부품 공급망 거래를 넘어 전략적 동반자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한국의 반도체와 메모리 등 인공지능 인프라 하드웨어 역량과 중국의 대형 언어 모델과 플랫폼형 인공지능 개발 능력을 결합해, 동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인공지능 가치사슬을 공동 주도하는 구상이 제시된 것이다. 업계와 연구계에서는 미중 기술 패권과 기술민족주의로 공급망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한중이 경쟁 구도가 아닌 상호보완적 협력 모델을 설계할 수 있을지가 향후 인공지능 산업 지형을 가를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후원룽 중국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소 부연구원은 11일 베이징 차오양구 켐핀스키호텔에서 산업연구원 북경지원이 개최한 국제세미나에서 한중 인공지능 협력 방향을 제시했다. 세미나는 산업 대전환기를 맞아 한중 산업협력의 새로운 단계를 모색한다는 주제로 열렸고, 인공지능이 핵심 의제로 부상했다. 후 부연구원은 한국과 중국 모두 인공지능을 국가 전략의 핵심 축으로 채택한 만큼, 기존의 수직적 공급망 협력을 넘어 생태계 차원의 전략적 협력으로 확장할 여지가 크다고 평가했다.

그가 제안한 기본 구도는 역할 분담에 기반을 둔 가치사슬 재설계다.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제조사를 중심으로 서버용 D램, HBM과 같은 인공지능 가속용 메모리, 시스템 반도체 등 하드웨어 경쟁력이 축적돼 있다. 중국은 바이두와 알리바바 등 빅테크를 중심으로 대형 언어 모델과 검색, 커머스, 핀테크와 연동된 플랫폼형 인공지능 서비스에서 빠른 반복 개발과 대규모 상용화를 강점으로 쌓아왔다. 후 부연구원은 이런 구조를 토대로 한국이 인공지능 반도체와 컴퓨팅 인프라를 제공하고, 중국이 그 위에서 알고리즘과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가치사슬을 고도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인공지능 산업의 특징을 깊은 수직 통합과 특정 분야 특화 역량으로 요약했다. 서버용 메모리와 팹 운영, 제조 장비와 소재까지 이어지는 체계 덕분에, 특정 산업용 인공지능나 제조 최적화용 인공지능처럼 한정된 영역에서 고정밀 솔루션을 설계하는 데 강점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중국은 검색·커머스·클라우드 등 복수의 대형 플랫폼에 인공지능을 얹어 수평적으로 확산시키는 구조가 두드러지고, 대규모 사용자 데이터를 활용해 서비스 성능을 짧은 주기로 개선하는 능력이 두드러진다고 진단했다.
후 부연구원은 이런 상이한 강점이 충돌보다는 상호보완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정교한 하드웨어와 특정 분야 특화 인공지능이 중국의 대규모 플랫폼과 결합할 경우, 단순 성능 개선 수준이 아닌 파괴적 혁신을 촉발할 여지도 있다는 판단이다. 예를 들어 고성능 인공지능 반도체와 메모리를 기반으로 한 중국의 대형 언어 모델 학습 가속, 한국 제조업 현장에 중국 플랫폼형 인공지능 서비스 도입을 통한 생산성 혁신 등이 거론될 수 있다.
그는 또 한중 관계를 인공지능 분야에서 단순 경쟁자로 보는 시각에 선을 그었다. 두 나라가 보유한 기술 스택과 시장 구조, 정책 방향을 종합하면 오히려 전략적 상호보완성이 크다는 평가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기술민족주의와 공급망 블록화가 강화되는 가운데, 한중이 협력 심화를 통해 동아시아 인공지능 가치사슬을 공동 구축하면 글로벌 주도권 확보와 동시에 외부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다는 시각을 제시했다.
구체적인 협력 분야로는 인공지능 반도체와 고급 하드웨어, 자율주행과 스마트 모빌리티, 디지털 헬스케어와 건강 서비스, 로봇 기술과 스마트 제조, 스마트 시티와 디지털 거버넌스 등이 열거됐다. 인공지능 반도체와 고급 하드웨어에서는 고대역폭 메모리, 인공지능 가속기, 데이터센터용 서버를 축으로 한 협력, 자율주행과 스마트 모빌리티에서는 센서와 차량용 반도체, 지도 데이터, 차량용 운영체제와 클라우드의 결합이 논의 대상으로 거론된다. 디지털 헬스케어와 건강 서비스 영역에서는 유전체·영상 데이터 분석과 원격 모니터링, 맞춤형 건강 관리 서비스에 한국의 의료 인프라와 중국의 플랫폼·사용자 기반을 연계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로봇과 스마트 제조 분야에서는 양국 제조 강점을 공유해 공장 자동화, 협동 로봇, 예지 정비 솔루션 등에서 인공지능 기반 생산방식 혁신을 시도할 여지도 제시됐다. 스마트 시티와 디지털 거버넌스 영역에서는 도시 교통·에너지·환경 모니터링과 행정 데이터 활용 등에서 인공지능 도입을 확대하면서도, 데이터 보호와 알고리즘 투명성을 놓고 공동 기준을 모색하는 형태의 협력이 가능할 것으로 관측된다.
후 부연구원은 한중 인공지능 협력이 단기 프로젝트 수준을 넘어 구조적 결합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한 기술 교류나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단발 거래를 넘어서, 특정 산업과 응용 분야에서 깊은 결합과 능력 교환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협력의 핵심 방향을 공급망 거래 중심에서 공동 혁신과 시장 공동 개척 중심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동 연구개발, 합작 법인을 통한 솔루션 상용화, 제3국 공동 진출과 같은 형태가 그 예로 거론될 수 있다.
산업연구원 측도 공급망 관점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중 공급망 협력이 산업 간 분업이나 산업 내 분업 수준에 머무르지 말고, 제품 내부 기능과 성능에서의 차별화를 통해 고부가가치 구조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매개로 로봇과 자율주행차 같은 신산업뿐 아니라 스마트 제조 등 기존 생산방식까지 전반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양국 기술·산업 협력 강화를 주문했다.
조 연구위원의 발언은 인공지능이 개별 산업의 비용 절감 도구를 넘어, 가치사슬과 공급망 구조를 통째로 바꾸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 한중이 각자의 강점을 명확히 하면서도 중복 투자를 줄이고, 기술 표준과 인증, 데이터 활용 규범을 함께 정립해 나간다면 동아시아 인공지능 생태계의 경쟁력이 한층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대로 정책과 제도, 보안·윤리 기준이 어긋날 경우 공급망 연계 자체가 제약을 받을 수 있어, 정부 차원의 협의 채널과 공동 규범 논의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향후 한중 인공지능 협력이 어느 수준까지 제도화되고 실제 사업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대외 환경 악화와 기술 안보 이슈, 데이터 국경 규제 등 변수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산업계와 연구계에서는 인공지능이 양국 산업 구조 전환의 핵심 수단이 된 만큼, 경쟁과 견제를 전제로 하더라도 선택적·전략적 협력 틀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동아시아 인공지능 질서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산업계는 이런 논의가 실제 시장과 공급망 구조 변화로 이어질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