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겨울 들판의 석탑”…익산에서 찾은 천년의 쉼과 한 잔의 온기
요즘 겨울 여행지를 고르는 사람이 달라졌다. 예전엔 반짝이는 조명과 번화한 거리를 떠올렸지만, 지금은 조용한 사찰 터와 한적한 카페에서 쉬어 가는 시간을 찾는다. 사소한 선택 같지만, 그 안엔 북적임 대신 고요를 향해 걷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전라북도 익산은 그런 겨울의 마음을 품기에 어울리는 도시다. 고대 백제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주변을 포근히 감싸는 평야와 마을 풍경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람들은 익산을 찾으며 굳이 많은 것을 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조금 걷고, 조금 보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낀다.

익산 영등동의 카페 뭉송은 그런 하루의 시작점이 되곤 한다. 이곳에는 아침마다 케이크와 쿠키, 스콘, 브라우니, 크럼블, 푸딩, 휘낭시에, 파운드 같은 수제 디저트가 한가득 채워진다. 유리 진열장 앞에 서면 어떤 것을 고를지 잠시 망설이게 되고, 그 망설임마저 여행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 한 조각의 케이크를 앞에 두면, 사람들은 무심코 “이제야 비로소 쉬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공간은 과함 없이 소박하고, 친절한 분위기는 겨울 공기와 잘 어울린다.
도심을 벗어나 삼기면으로 향하면, 메이드인헤븐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가 풍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커다란 창 너머로 펼쳐지는 들판과 나무들, 계절의 색을 담은 하늘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감각적인 인테리어는 과시보다 여백을 택한 듯 차분하고, 깔끔하게 관리된 실내는 머무는 사람의 마음을 단정하게 만든다. 주차 공간이 넉넉해 차를 몰고 온 여행자들도 부담 없이 들른다. 잘 추출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누군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충분한 오후”라는 표현을 떠올린다.
이런 여유로운 시간의 정점에는 익산 금마면의 미륵사지가 있다. 백제 무왕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곳은 백제 최대의 사찰 터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넓은 들판 위에 국보 미륵사지 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겨울에 찾은 미륵사지는 특히 더 고요하다. 바람 소리와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광활한 터를 걷다 보면, 도시의 소음이 멀어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복원된 가람 배치를 따라 걸으며 백제 시대의 건축 기술과 불교 문화를 짐작해 보는 시간은, 단순한 구경을 넘어 일종의 사색이 된다. 붐비지 않는 시야, 막힘 없는 수평선 같은 평야 풍경은 겨울이 주는 텅 빈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여행 패턴의 흐름에서 분명히 감지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새로움만 좇지 않고, 머물고 싶은 장소를 고른다. 대형 관광지 대신 세계문화유산과 작은 카페를 한 동선에 담는 선택이 익숙해졌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를 찾고 싶어 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일상 회복형 여행’이라 부르며, 피로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멀리 떠나는 대신 깊게 머무는 방식을 택하는 움직임이라고 해석한다.
익산 함열읍의 고스락은 이 흐름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3만여 평의 대지 위에 5천여 개 항아리가 빼곡히 놓인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인상을 남긴다. 유기농 재료로 담근 전통 장이 항아리 속에서 천천히 발효되는 시간은, 우리가 잊고 지낸 느린 호흡을 떠올리게 한다. 장류 생산 방식을 설명하는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맛은 결국 시간이 만든다”는 선조들의 지혜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겨울의 항아리 정원은 유독 고즈넉하다. 푸른 잎이 줄어든 자리, 촉촉이 내려앉은 공기와 낮은 햇살이 항아리의 곡선을 더 또렷이 드러낸다.
고스락을 찾은 이들은 정원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솔잎 효소차, 모과 효소차 같은 발효차를 천천히 음미한다. 입안 가득 퍼지는 은근한 향과 달큰한 여운을 느끼며, 누군가는 “이 온기는 난방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에서 온 것 같다”고 고백한다. 전통 장 시음과 시식을 통해 경험하는 깊은 맛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차를 마시다 보면, 여행이라기보다 오랜 친구 집에 들른 듯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겨울 미륵사지는 꼭 걸어봐야 한다”, “고스락 효소차 마시고 나니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익산 카페 투어만으로도 하루가 꽉 찬다”는 경험담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주말에 반나절만 다녀와도 충분히 리셋된 기분을 맛봤다고 표현하고, 또 다른 이는 부모님과 함께 항아리 정원을 거닐며 세대가 다른 취향을 공유했다고 전한다. 여행이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삶의 리듬을 조율하는 한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겨울의 익산에서 보내는 하루는 대단한 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등동의 카페에서 수제 디저트를 고르고, 삼기면의 카페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미륵사지에서 천년의 시간을 걷고, 고스락 항아리 정원에서 발효차 한 잔으로 몸을 덮이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 사이사이 공백처럼 남은 시간 안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속도로 숨을 고른다.
여행의 목적이 바뀌고 있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찍기보다, 조금 멈추고, 조금 느끼는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고 있다. 익산의 겨울 풍경은 그 변화를 조용히 받아들이며, 서서히 다가와 머물다 가라고 말 건네는 듯하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