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산사에 서 있었다”…충남 겨울, 고요와 온기가 머무는 시간
요즘 일부러 한겨울의 충남을 찾는 이들이 늘었다. 예전엔 봄꽃과 가을단풍의 계절에만 어울리는 여행지라 여겨졌지만, 지금은 고요한 사찰과 따뜻한 온천, 소박한 시장이 어우러진 사색의 겨울 일상이 됐다. 사방이 조용한 듯한 계절 속에서 사람들은 몸을 덥히고 마음을 식히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다.
충남의 겨울 길 위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눈을 이고 선 산사다. 공주 사곡면의 마곡사는 깊은 숲에 안긴 채 천천히 계절을 받아들이는 곳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답게 대웅보전과 대광보전, 영산전 같은 전각들이 나란히 서 있고, 5층 석탑을 비롯한 문화유산이 마당 한편에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사람 발길이 뜸한 평일 오전이면 들리는 건 계곡 물소리와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가지 소리뿐이다. 잘 정돈된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말수도 줄어든다. 한 여행객은 “사진을 찍으려다 휴대전화를 잠시 내려두고, 그저 서서 산을 올려다봤다”고 표현했다. 겨울의 마곡사는 그렇게 사람을 멈춰 세운다.

이런 변화는 여행의 목적에서도 드러난다. 예전처럼 먼 곳을 찍어 다니는 일정 대신,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나를 돌아보려는 수요가 많아졌다. 사찰 산책로를 걷고, 작은 돌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정리하는 식이다. 관광 업계에선 이런 흐름을 ‘쉼 중심 여행’이라 부르며, 계절과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사색형 코스로 충남을 주목하고 있다.
추운 공기를 충분히 마셨다면, 다음엔 몸을 데울 차례다. 아산 도고면의 파라다이스스파도고는 겨울철 피로를 녹이기 위해 찾는 이들로 붐비는 온천 공간이다. 충청남도 보양온천 1호로 지정된 만큼 유황 온천수의 효능에 대한 신뢰가 두텁다. 각기 다른 온도의 실내외 스파풀이 준비돼 있어, 야외 풀에 몸을 담그면 하얀 수증기 사이로 겨울 하늘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이들을 위한 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 부모는 뜨거운 물에서 어깨를 풀고, 아이는 물놀이에 웃음을 터뜨린다. 한 지역 주민은 “몸이 먼저 풀리면, 마음속에 쌓였던 긴장도 자연스럽게 내려앉는 느낌”이라고 고백했다. 온천은 단순한 물놀이가 아니라, 지친 일상에서 빠져나와 내 몸을 다시 느껴보는 의식 같은 시간으로 자리 잡는 중이다.
충남의 겨울 감도는 물과 산만이 아니다. 예산읍의 예산시장은 계절과 상관없이 뜨거운 온기를 품은 곳이다. 시장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튀김 기름 소리와 구수한 국물 냄새가 먼저 반긴다. 여행객들은 SNS에 시장 먹거리를 올리며 작은 ‘겨울 미식 인증’을 즐긴다. 떡집 앞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좌판에는 지역 특산물이 정갈하게 놓인다. 상인들은 “처음이시죠”라며 말을 건네고, 여행자들은 “뭘 먹어야 맛있냐”고 묻는다. 이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시장은 낯선 이들을 금세 자기 사람처럼 품어준다. 댓글 반응에서도 “겨울 충남에선 시장 한 곳쯤은 꼭 들른다”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온천과 사찰에서 채우지 못한 ‘사람 온기’를 전통시장에서 채우려는 마음이 느껴진다.
조금 더 한적한 풍경을 원한다면, 서산 운산면의 서산유기방가옥이 좋은 대안이 된다.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이 한옥은 사계절이 또렷하지만, 특히 봄철 수선화로 잘 알려져 있다. 다만 겨울의 유기방가옥은 꽃 대신 여백이 주인공이다. 마당을 가르는 돌길과 기와지붕, 가지를 모두 털어낸 나무가 어우러져 담백한 풍경을 만든다. 잘 가꾸어진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까치가 지붕 위를 스치는 소리와 먼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이 공간을 채운다. 사진을 찍어도 화면의 반 이상이 빈 하늘과 마당일 때가 많다. 한 문화재 해설사는 “텅 빈 것처럼 보여도, 사람 마음이 들어갈 자리를 넉넉히 남겨둔 풍경”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이곳의 겨울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전문가들은 이런 겨울 여행의 변화를 ‘속도 조절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예전처럼 볼거리 위주의 빠른 동선보다, 사찰에서의 한 시간, 온천에서의 반나절, 시장에서의 짧은 대화처럼 작은 장면에 시간을 더 쓰려는 흐름이다. 여행 심리 분야에선 “머리로 남는 여행보다 몸과 감정에 남는 여행을 원하는 시대”라고 설명한다. 일정표에 적힌 명소는 줄어들어도, 돌아와서 기억나는 순간은 훨씬 선명해지는 방식이다.
실제로 겨울 충남을 찾았던 이들은 “사진첩보다 머릿속 풍경이 더 또렷했다”고 말한다. 마곡사 숲길에서 들었던 눈 밟는 소리, 스파도고 온천수에 잠긴 발끝의 따뜻함, 예산시장의 소란스러운 점심시간, 유기방가옥 마당의 고요까지, 그 모든 감각이 뒤섞여 하나의 긴 하루로 남는다. 달라진 건 관광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다. 빠르게 소비하는 대신, 천천히 머무르며 사소한 장면에 마음을 얹는다.
충남의 겨울 여행은 거창한 결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느리게 걷고,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쉬어 가자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차갑고 맑은 공기 속에서 따뜻한 물과 사람, 그리고 여백 많은 풍경을 만나는 일은, 어쩌면 요즘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휴식일지 모른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