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당뇨병 새 분류체계 발표…정밀 치료 전환 속도낸다
당뇨병 중증도를 수치로 평가하는 새 기준이 도입되며 국내 당뇨병 진료 패러다임 전환이 예고되고 있다. 대한당뇨병학회가 대사 상태와 합병증 부담을 통합 반영한 분류체계를 공개하면서, 환자별 위험도에 따라 치료 강도를 조절하는 정밀의료 접근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학회는 이를 토대로 전문가 진료 의뢰 기준과 건강보험 보장성 논의까지 연계하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업계와 의료계에서는 인구 고령화와 당뇨병 환자 급증 속에 의료 자원 배분과 합병증 예방 전략을 재정비할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대한당뇨병학회는 3일 서울대학교 암연구소 이건희홀에서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와 공동 심포지엄을 열고 중증 당뇨병 관리 강화를 위한 새 분류체계 DGSC를 공식 발표했다. 당뇨병을 그동안 1형과 2형으로만 나누던 방식에서 벗어나, 질환 자체의 중증도와 합병증 진행 정도를 동시에 계량화한 점이 핵심이다. 이 체계는 학회 중증당뇨병 테스크포스팀이 개발했으며 국제학술지 Diabetes and Metabolism Journal에 게재됐다.

DGSC는 대사 이상 정도를 평가하는 대사 등급과 장기 손상 정도를 반영하는 합병증 단계를 결합한 이중 구조다. 대사 등급은 인슐린 분비 부족과 인슐린 저항성 정도를 수치화해 1에서 4등급으로 나눈다. 인슐린 분비 능력은 C펩타이드 수치로, 인슐린 저항성은 하루 인슐린 사용량 등으로 평가한다. 생활습관 교정이나 경구약만으로 조절 가능한 초기 환자는 1등급, 여러 경구약과 주사제 병합이 필요한 환자는 2등급, 인슐린 주사 치료가 필수적인 경우는 3등급, 인슐린 분비가 거의 되지 않거나 극심한 저항성을 보이며 당뇨병케토산증, 고삼투압성 혼수, 중증 저혈당 등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 동반될 수 있는 상태는 4등급 초중증으로 분류했다.
합병증 단계는 심장, 신장, 눈, 신경 등 주요 장기의 손상 정도를 반영해 1기부터 4기까지 구분한다. 심혈관질환, 심부전, 만성신장질환, 당뇨병망막병증, 신경병증이 평가 대상이다. 합병증이 아직 없지만 고혈압, 비만 등 위험 요인이 존재하면 1기, 정밀검사에서만 발견되는 초기 합병증은 2기, 협심증 발생, 신장 기능 저하, 시력 이상 등 임상적으로 증상이 확인되는 단계는 3기, 심근경색, 말기 신부전, 실명과 같이 생명을 직접 위협하는 진행 상태는 4기로 구분된다. 특히 이번 체계는 고위험 군을 가려내기 위해 검사상 변화와 임상 증상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한 점이 특징이다.
학회는 DGSC를 활용해 중증 당뇨병의 정의도 새로 제시했다. 연구 책임자 조영민 법제이사 서울대학교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대사 등급 3 이상 또는 합병증 단계 3 이상을 중증 당뇨병으로 규정했다면서 인슐린 기능이 크게 떨어졌거나 주요 장기 손상이 상당 부분 진행된 환자를 집중 관리 대상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차봉수 이사장 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당뇨병은 흔한 질환이어서 1차 의료기관에서 널리 진료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전문의에게 의뢰해야 하는지 기준이 불분명했다고 지적하며 DGSC에서 대사 3등급 이상이나 합병증 3단계 이상인 경우 당뇨병 전문가 진료를 권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증 기준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임상적 위험 신호가 반복되면 전문의 진료가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됐다. 혈당이 지속적으로 높거나 심한 저혈당이 자주 발생하는 경우, 하루 중 혈당 변동 폭이 매우 큰 경우, 당뇨병망막병증, 신장병, 심장병이 짧은 기간에 빠르게 악화될 때는 DGSC 수치와 무관하게 전문가 개입이 요구된다는 설명이다. 이는 수치화된 분류체계와 실제 임상 판단을 병행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이번 분류체계 도입은 정밀의료 관점에서도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최성희 홍보이사 분당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당뇨병은 흔하다는 이유로 가벼운 만성질환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인슐린 결핍 정도와 심혈관, 신장, 신경 손상 수준에 따라 양상이 크게 다른 이질적 질환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DGSC가 대사기능 장애와 합병증 부담을 동시에 평가함으로써 환자 개인의 위험도에 맞춘 치료 전략 수립과 의료 자원 배분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사 등급이 높은 환자에게는 인슐린 치료와 집중 교육을, 합병증 단계가 높은 환자에게는 심장학, 신장내과, 안과와의 협진을 체계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글로벌 흐름과 비교하면 DGSC는 국가 차원의 당뇨병 관리 인프라에 적합한 계량 도구로 활용될 여지도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당화혈색소 수준, 체질량지수, 합병증 유무 등을 조합해 고위험 환자를 선별하지만, 인슐린 분비능과 저항성을 동시에 반영한 공식 분류체계를 국가 학회 차원에서 제시한 사례는 많지 않다. 국내에서는 건강보험 청구 데이터, 검사 결과, 처방 이력을 DGSC와 연동할 경우 합병증 발생 위험 예측 모델 개발과 공공 정책 설계까지 연계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정책적 파급 효과도 주목된다. 학회는 2025 당뇨병 진료지침을 발간해 DGSC를 반영한 표준 치료지침을 제시하고, 1형 당뇨병의 췌장장애 인정을 통한 보장성 강화, 병원 내 혈당관리실 운영 근거 확보 등 제도 개선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DGSC 기준을 토대로 중증 당뇨병 환자에 대한 입원관리, 교육상담,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펌프 같은 디지털 헬스케어 기기의 보험 적용 범위를 재조정할 논의도 뒤따를 수 있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데이터 축적과 후속 연구를 통해 DGSC가 장기 예후와 의료비 절감 효과를 입증하게 되면 건강보험 수가 체계 개편의 기준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DGSC가 실제 진료현장과 공공정책에 얼마나 빠르게 스며들지가 관건이라고 본다. 병원마다 검사 체계와 진료 프로세스가 다른 만큼, C펩타이드 검사와 인슐린 사용량 기록, 합병증 평가 표준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내분비내과 전문의는 새로운 분류체계가 도입돼도 의료진 교육과 환자 설명, 건강보험 제도 반영 속도가 따라오지 못하면 현장 활용도는 제한적일 수 있다며 데이터 기반 검증과 제도적 뒷받침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와 의료계는 DGSC가 국내 당뇨병 관리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을지 주목하고 있다. 산업계는 이번 체계가 실제 진료와 건강보험 제도에 안착할 경우, 정밀의료와 디지털 헬스케어, 의료 데이터 산업 전반의 성장 조건이 한층 구체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술과 진료, 제도와 재정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가 당뇨병 관리 패러다임 전환의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