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외교부에 대북정책 못 맡긴다"…진보정부 통일장관들, 한미 정례공조회의 제동

이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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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정책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부상했다. 진보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인사들이 한미 외교 당국이 추진 중인 정례 대북정책 공조회의에 집단 반대 입장을 내며 외교부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통일부 중심의 남북관계 운용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외교 라인의 대북 공조 강화 구상이 충돌하는 양상이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조명균 전 통일부 장관,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이인영 전 통일부 장관은 15일 발표한 성명에서 정례 한미 대북정책 공조회의 구상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제2의 한미 워킹그룹을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전문성이 없고, 남북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교부에 대북정책을 맡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전직 장관들은 외교부 주도의 대북정책이 헌법 체계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대북정책을 외교부가 주도하는 것은 헌법과 정부조직법의 원칙에 반한다"고 밝히며, 통일부가 남북관계의 주무 부처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어 "과거 남북관계 역사에서 개성공단을 만들 때나 제재 완화를 검토할 때, 외교부는 미국 정부보다 훨씬 더 부정적이고 보수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특히 한미 워킹그룹을 다시 띄우려는 시도로 해석되는 외교당국 간 정례 협의에 우려를 집중했다. 성명에서 "대북정책은 통일부가 주무 부처"라며 "외교부 주도의 한미 워킹그룹 가동 계획을 중단하고, 통일부가 중심이 돼 남북관계 재개 방안을 마련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 성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게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직 장관들은 한미 공조 기구가 대북 제재 조율 창구로만 작동할 경우 남북 협력사업이 다시 제약받을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미국 측 핵심 인사의 성향도 문제 삼았다. 성명에서 "최근 언론에 보도된 미국 실무대표의 생각을 보면, 그가 참여하는 한미 정책협의는 북미 정상회담의 환경 조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미가 이르면 16일 처음 열 계획인 정례적 정책 공조회의에 미국 측에서는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가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전직 장관들은 그가 대북제재와 북한 인권 문제 등에 대해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만큼, 협의체가 유연한 협상 환경을 조성하기보다는 제재 기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친 셈이다.

 

전직 통일부 장관들의 집단 성명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기조와도 맞닿아 있다. 이들의 입장은 대북정책은 통일부가 주무 부처이며 외교 당국 간 정례 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정동영 장관의 견해와 동일하다고 평가된다. 통일부 라인은 남북관계 관리와 북미 대화 지원을 통일부 중심 구조로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외교부는 한미 대북정책 정례 협의에 대한 우려가 과도하다는 입장이다. 외교부는 정례 협의가 과거 한미 워킹그룹처럼 남북 합의나 사업을 사전 조율·제약하는 구조로 운영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해 왔다. 외교부는 한미 간 대북 제재 이행, 북핵 협상 전략, 인도적 지원 방안 등 포괄적 현안을 조율하는 차원의 협의체이며, 통일부와의 협업도 병행하겠다는 방침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통일부와 외교부 간 역할 조정 논쟁이 향후 대북정책 전반의 방향성과 직결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특히 남북관계 경색 장기화와 북미 대화 교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어느 부처가 전략 수립의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제재와 대화, 인권과 안전보장, 경제협력과 안보 공조의 균형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도 뒤따르고 있다.

 

이날 전직 통일부 장관들이 집단으로 목소리를 모으면서, 한미 정례 공조회의를 둘러싼 논쟁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와 국회는 향후 회의 운영 방식과 부처 간 역할 분담을 놓고 추가 논의를 이어갈 것으로 보이며, 외교부와 통일부는 대북정책 컨트롤타워를 둘러싼 인식 차이를 조율할 해법을 모색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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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정세현#한미워킹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