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누진·주35시간 실험”…현대차 노조 강성 노선→노사 지형 변화 주목
국내 완성차 산업의 최대 조직인 현대자동차 노조가 강경 성향 지부장을 선출하며 노동 조건 전반의 손질을 예고했다. 퇴직금 누진제 도입, 주 35시간제 시범 시행, 신규 채용 확대와 지역 가산점, 친환경차 국내 우선 생산 등 굵직한 안건이 한꺼번에 테이블에 오르면서, 현대자동차 노사 관계는 물론 국내 제조업 노사 지형 전체에 미묘한 긴장이 형성되고 있다. 전동화 전환과 글로벌 비용 경쟁이 격화되는 시점에 노동 강도 경감과 보상 확대가 동시에 추진될 경우, 국내 공장 운영 전략과 해외 투자 배분에도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11대 임원 선거에서 금속연대 소속 이종철 신임 지부장이 54.58% 득표로 당선됐다고 10일 밝혔다고 전했다. 이 지부장은 선거 과정에서 조합원 중심, 현장권력 복원을 내세우며 강성 기조의 노선 전환을 분명히 했다. 핵심 공약으로는 퇴직금 누진제, 직군·직무별 수당 인상, 통상임금 산입 범위 확대, 상여금 800% 확보, 주 35시간제 시범 도입, 생산라인 근무시간 1시간 단축, 공장 소재지 출신자의 신규 채용 가산점 등이 제시됐다. 여기에 임금피크제 폐지와 국민연금 수급 시기에 연동한 정년 조정 등 기존 대공장 노조가 반복해 온 의제를 다시 전면에 올리며 조합원 결집을 도모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퇴직금 누진제는 장기 근속자에게 상당한 재정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기업 비용 구조와 인력 관리 체계 전반에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는 방안으로 평가된다. 이 지부장이 제안한 시나리오에 따르면 근속연수 5년 이상 10년 미만은 2개월 치, 10년 이상 15년 미만 3개월 치, 15년 이상 20년 미만 5개월 치, 20년 이상은 7개월 치의 퇴직금을 지급하는 형태다. 평균임금 1천만원, 근속연수 28년을 가정할 경우 통상적 퇴직금 2억8천만원에서 7천만원이 추가된 3억5천만원을 수령하는 구조다. 퇴직급여 충당부채가 크게 늘어날 수 있는 만큼, 현대자동차의 재무제표와 장기 인건비 계획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자동차 산업 분석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주 35시간제 도입 구상도 파급력이 크다. 현재 주 40시간 체계를 연구·일반직과 전주공장에서 내년 주 35시간으로 우선 전환하고, 이후 다른 공장으로 단계적 확산을 추진하겠다는 것이 이 지부장의 복안이다. 연구·일반직에는 사실상 주 4.5일제에 해당하며, 생산직에는 매일 1시간씩 근무시간을 줄이는 효과가 예상된다. 유급 노동시간 축소는 생산성 향상과 설비 가동 효율 개선 등으로 상쇄되지 않으면 원가 상승으로 직결될 수 있어,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차종 가격 경쟁이 치열한 글로벌 시장에서 현대자동차의 가격 전략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부장이 당선 즉시 전담팀을 구성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노조 내부에서는 근로 시간 단축을 둘러싼 논의가 속도를 낼 가능성이 크다.
정년퇴직 인원에 연동한 신규 채용 확대와 공장 소재지 출신자에 대한 가산점 부여는 지역 경제와 청년 고용 측면에서 주목받는 지점이다. 울산, 전주, 아산, 남양 등 주요 공장 및 연구 거점에서 지역 출신에게 가산점을 주는 방식은 장기적으로 지역 밀착형 고용 생태계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동시에, 국가 차원의 균형 발전 전략과 다른 기업·기관의 지역 인재 우대 정책과 맞물리면서 이른바 대기업 정규직 일자리의 지역 귀속성이 심화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고용 안정 차원에서 전동화·자동화 공장과 해외 공장 운영에 노조 개입을 강화하고, 친환경차 국내 우선 생산 협약을 추진하겠다는 공약은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완성차 기업의 투자 유연성과 배치될 소지가 있다.
친환경차 국내 우선 생산은 공장 가동률 유지와 숙련 인력의 전환 교육, 부품 협력사 생태계 유지에 긍정적일 수 있다. 반면, 특정 국가 공장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접근은 환율, 물류비, 관세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하는 완성차 기업의 글로벌 분업 전략과 긴장을 빚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동화·자동화 설비 도입 과정에 노조 개입이 강화될 경우, 인력 재배치와 라인 자동화 일정이 교섭 과정에 얽히면서 기술 전환 속도가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 배터리 조달, 소프트웨어 통합 경쟁이 본격화된 상황에서 노사 합의의 지체가 현대자동차의 시장 대응력을 떨어뜨릴 가능성은 노사 모두에게 리스크다.
임금피크제 폐지와 정년 연장 논의 역시 인구구조 변화와 맞물려 민감한 이슈로 떠오를 전망이다. 국내 노동시장은 고령화와 생산연령인구 감소라는 구조적 과제에 직면해 있는데, 대규모 정규직 제조업 사업장에서 정년이 연장되면 신규 청년 채용 여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반면, 숙련 기술자의 조기 퇴직은 노하우 단절로 이어져 전동화와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개발이 가속되는 시점에 기술 경쟁력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는 평가도 공존한다. 정년과 임금 체계 개편을 둘러싼 노사 간 논쟁은 단순한 연령 문제를 넘어 기술 전환기 인력 포트폴리오 전략과 직결되는 사안으로 해석되고 있다.
결국 이 지부장의 공약 실현 여부는 현대자동차와의 단체교섭 과정에 좌우된다. 노동 조건 개선과 고용 안정, 친환경차 국내 생산 확대라는 노조의 요구와, 전동화 투자와 글로벌 경쟁력 유지를 중시하는 회사 측의 전략 사이 접점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한 노사관계 전문가는 신임 지부장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물을 내세워 당선된 만큼 강한 투쟁을 선택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분석하며, 강경 노선이 현실화될 경우 올해 현대자동차 노사 관계가 적잖은 진통을 겪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국내 자동차 산업의 방향성과 제조업 노사 관계의 새로운 기준이 현대자동차 교섭 테이블에서 시험대에 오른 셈이라는 평가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