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도입 빠진 의료인력 추계”…의사단체, 의대정원 논의 정조준
인공지능과 디지털 의료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정부 의사인력 수급추계위원회가 2027학년도 의과대학 정원 규모를 논의하는 방식을 두고 의료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향후 10년 이상 의료 인력 수급을 좌우할 핵심 변수로 AI·로봇 수술·원격의료 등 기술 변화가 지목되는 상황에서, 정작 정책 설계에는 과거 중심의 단순 통계만 동원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의료계는 “기술 도입에 따른 생산성 변화와 근무 형태 변화를 제외한 채 머릿수만 늘리는 식의 접근은 산업 구조를 거꾸로 역행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번 논의를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 의료정책의 분기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현재 의사인력 수급추계위원회는 12차 회의를 열어 2027학년도 의대 정원 규모를 논의 중이다. 당초 11차 회의에서 연내 최종 정원을 확정할 계획이었지만, AI 도입 등 미래 의료 환경 변수 반영을 두고 위원 간 합의에 이르지 못해 논의가 장기화되는 양상이다. 추계위가 도출하는 수치는 향후 입시와 의대 교육, 의료기관 인력 계획의 기준선이 되기 때문에 이해관계자들의 긴장감도 커지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날 발표한 입장문에서 추계위의 접근 방식을 “비과학적”이라고 규정했다. 의협은 “현재 추계위는 인공지능 도입, 의료 기술 발전, 생산성 변화 등 미래 의료 환경의 핵심 변수를 사실상 배제한 채 과거 방식대로 형해화된 논의만 진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AI 진단 보조 소프트웨어, 영상 판독 알고리즘, 자동화된 처방 지원 시스템 등은 실제 의료 현장에서 이미 가동 중이며, 향후 도입 범위에 따라 의사 1인당 처리 가능한 진료량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의료계의 인식이다.
의협은 또 감사원의 지적 내용을 상기시키며 추계위 논리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감사원은 앞선 감사에서 “구조적 요인을 반영한 가정에 따라 결괏값이 크게 달라지므로 타당성을 확보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의협은 “현재 논의는 감사 결과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주장했다. 인구 고령화, 질병 구조 변화, 여성 의사 비율 증가, 전문과목 편중, 근무형태 다변화 등 구조적 요인을 통합적으로 반영해야 하는데, 일부 단순 변수 조정에 치우친 추계 모델로는 신뢰할 수 있는 전망을 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교육 기반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의협은 “의학교육평가원의 인증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대학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교육 여건의 심도 있는 고려 없이 단순히 숫자만 맞추는 식의 논의는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첨단 의료기기, 시뮬레이션 랩, AI 교육 커리큘럼, 임상 실습 인프라 등 디지털 전환에 대응할 의학교육 기반이 불충분한 학교에까지 대폭적인 정원 확대를 밀어 넣을 경우, 중장기적으로 역량 격차와 지역 간 진료 품질 불균형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대한의사협회는 특히 “정부의 입시 일정에 맞추려는 무리한 결정보다 철저한 과학적 검증과 교육 여건의 현실적 고려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입시 일정에 맞춰 연내 수치를 확정하는 것을 ‘정치적 데드라인’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의료계는 “의료인력 정책은 최소 수십 년을 내다보는 산업 정책이자 보건 안전 전략이므로 정치 일정과 분리해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공의 단체도 목소리를 보탰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별도 입장문에서 추계위가 제시한 수급 모형의 기초 데이터와 가정 자체를 문제 삼았다. 대전협은 “추계위는 과학적 모형을 표방하나 그 실상은 의료 현장의 본질적 변수를 배제한 자의적 상수 설정에 의존하고 있다”며 “부실한 데이터에 근거해 의대 정원 확대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타당성이 결여된 성급한 판단이며, 정책의 신뢰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행위”라고 평가했다.
이 단체는 특히 근무 일수와 업무량 반영 방식을 지적했다. 대전협은 “추계위는 의료 현장의 업무량과 실질 근무 일수를 온전히 반영하지 않고 있다”며 “근무 일수 가정을 소폭 조정하는 것만으로 수만 명의 수급 전망이 부족에서 과잉으로 뒤바뀌는 결과는 현재 모델이 얼마나 취약한 가설에 의존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전공의 근무시간 상한제, 필수의료 기피, 야간·주말 당직 부담, 여성 의사의 출산·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등으로 인해 명목상 인원과 실질 가용 인력 사이에 큰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 반복돼 왔다.
AI와 디지털 헬스케어 확산에 따른 생산성 변화도 쟁점으로 떠오른다. 의료용 AI는 영상 판독, 병리 슬라이드 분석, 약물 상호작용 체크, 중환자실 모니터링 등 특정 영역에서 이미 의사 업무를 보조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AI 기반 진료지원 시스템과 원격 모니터링이 표준화될 경우, 의사 1인당 담당 가능 환자 수와 병원당 필요한 전문 인력 구조가 크게 바뀔 수 있다는 전망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럼에도 추계위의 현재 논의에서 AI 도입률, 업무자동화 수준, 디지털 병원화 비율 같은 변수는 부차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게 의료계의 주장이다.
반면 정부와 일부 전문가 그룹에서는 고령화 속도, 필수의료 공백, 지역 불균형 등을 근거로 일정 수준 이상의 정원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응급의학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처럼 기피와 이탈이 누적된 과목은 AI 보조기술만으로는 당장 인력 공백을 메우기 어렵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얼마만큼 늘릴지, 어떤 지역과 학교에 배분할지, 교육 인프라를 어떤 속도로 보강할지에 대해 합의된 시나리오는 아직 제시되지 않은 상태다.
해외에서도 의료 AI 도입과 인력 정책 간 정합성 문제는 주요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미국과 유럽은 AI 진단보조 소프트웨어를 의료기기로 관리하면서도, 이를 인력 대체가 아닌 보조 수단으로 보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디지털 헬스케어 도입이 단기적으로는 데이터 입력과 시스템 관리 등 새로운 업무를 늘려 오히려 의료인 부담을 키울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결국 AI 도입이 실제로 어느 시점에, 어느 수준까지 생산성을 끌어올릴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정원 정책 수립 과정에서 다양한 시나리오를 전제로 한 복수 모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국내 규제와 정책 환경에서는 보건복지부와 의료계, 환자단체, 교육 당국이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는 의료 접근성 개선과 필수의료 강화, 지역 격차 완화를 정책 목표로 내세우고 있고, 의료계는 교육 여건과 기술 변화 속도를 감안한 ‘점진적 조정’을 요구하는 구조다. 특히 AI를 포함한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은 식품의약품 규제, 건강보험 수가, 데이터 활용 법제 등 여러 제도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의료 인력 추계 역시 이들 규제 변화의 궤적과 함께 설계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인공지능과 의사 인력 정책이 충돌이 아닌 상호 보완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한 의료정책 연구자는 “AI가 반복적 진료를 담당하고, 의사는 복잡한 의사결정과 환자 상담, 다학제 협진에 집중하는 구조로 재편된다면, 단순 인력 확대보다 역할 재설계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향후 수년간의 정원 정책이 그 전환을 촉진할지, 지연시킬지에 따라 국내 의료체계의 경쟁력이 갈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로서는 추계위가 2027학년도 정원 수치를 어느 수준으로 제시할지, 그리고 여기에 AI 도입과 의료기술 발전이라는 변수가 어떤 방식으로 반영될지가 핵심 관전 포인트가 되고 있다. 의료계와 정부 간 의견 차이가 큰 만큼, 산업계는 이번 논의가 실제 정책과 시장에 어떤 형태로 안착할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