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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도 위 롤러코스터를 탄다”…경주 여행은 지금 역사와 놀이 사이에서 흔들린다

조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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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경주를 찾는 발걸음이 달라졌다. 예전엔 수학여행지로만 떠올리던 도시였지만, 지금은 천년 역사를 보고 즐기고 쉬는 주말 여행의 일상적 선택지가 됐다. 고분과 놀이공원, 숲과 불국토가 한 여행 동선 안에 자연스럽게 섞인다. 사소한 코스의 변화지만, 그 안엔 여행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진 모습이 담겨 있다.

 

경주로 떠나는 사람들의 일정표를 보면 아침에는 신라의 시간을 만나고 오후에는 현대의 스릴을 더한다. SNS에는 돌무지덧널무덤 사이를 산책하는 사진과 롤러코스터 위에서의 인증샷이 한 계정 안에 나란히 올라온다. 석굴암 앞에서 잔잔한 감상을 적어 내려가던 이가, 몇 시간 뒤 경주월드에서 “오늘 하루 치 스트레스는 다 풀었다”고 표현하는 풍경이 이제는 자연스럽다.

출처=한국관광공사 경주월드
출처=한국관광공사 경주월드

여행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곳 중 하나는 경주시 진현동에 자리한 석굴암이다. 8세기 중엽 조성된 이 석굴 사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표적인 불교 예술 공간이다. 내부의 본존불은 동해를 향해 앉아 있어, 여행자는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는 신라인의 호국정신과 염원을 상상하게 된다. 엄숙한 침묵 속에서 정교한 조각과 균형 잡힌 공간미를 바라보다 보면, 짧은 여행 와중에도 마음 한켠이 고요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 관광 안내판의 연대기보다, 직접 마주한 석굴의 온도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문화유산을 ‘찍고 지나가는’ 방문이 아니라, 주변 산책로를 함께 걷고 사진을 남기며 감정을 기록하는 체류형 관광이 늘었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으로 다녀간 30·40대는 “예전에는 그냥 줄 서서 들어갔다 나왔던 곳인데, 지금은 왜 만들어졌는지가 보인다”고 털어놓는다. 젊은 세대는 석굴암의 조형미를 ‘미니멀한 공간 연출 같다’고 느끼며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한다.

 

경주의 하루를 더 입체적으로 만드는 장소로는 경주시 천군동의 테마파크 경주월드가 빠지지 않는다. 아시아 최초 싱글 레일 코스터로 알려진 스콜앤하티와 90도 수직 다이브 코스터 드라켄은 속도를 사랑하는 이들을 끌어당긴다. 한 번의 급강하 이후 커다란 비명을 터뜨리고 나면, 어른들도 “오랜만에 제대로 소리 질렀다”고 말한다. 가족 단위 여행객은 유아용 어트랙션과 함께 세대별로 나뉘어 즐길 수 있는 동선에 만족감을 표현한다. 그만큼 경주는 이제 ‘역사 공부하러 가는 곳’에서 ‘함께 놀 수 있는 도시’로 이미지가 넓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복합 감정형 여행’이라 부른다. 한 도시 안에서 배움, 즐거움, 쉼을 동시에 경험하려는 욕구가 커졌다는 해석이다. 굳이 여행 목적을 하나로 정하지 않고, 오전에는 유적지에서 과거를 상상하고 오후에는 놀이기구에서 현재의 몸을 깨우며, 저녁에는 숲이나 카페에서 자신을 쉬게 하는 식이다. 효율적인 동선보다 감정의 리듬을 기준으로 일정을 짜는 여행 방식이 자리 잡는 셈이다.

 

경주시 남산동의 경북천년숲정원은 이런 여행 동선에 ‘숨 쉴 틈’을 만들어 준다. 잘 정돈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계절마다 달라지는 색과 냄새가 차분히 스며든다. 놀이기구의 속도에 익숙해진 몸이 천천히 걸음 속도를 늦추는 순간, 방문객들은 “오늘 하루가 비로소 정리되는 기분”을 느낀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바람, 발밑에서 사각거리는 흙의 감촉은 스마트폰 화면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감각이다. 도시의 소음을 잠시 잊고 싶을 때, 아무 설명도 필요 없는 풍경이 조용히 곁을 내준다.

 

신라 왕릉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또 다른 시간이 펼쳐진다. 경주시 황남동의 천마총은 관람 동선 안으로 들어가 고분 내부 구조를 직접 마주할 수 있는 유적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발굴 당시 모습을 재현한 전시와 함께 천마도, 금관, 금제 허리띠 같은 유물들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화려한 장식들 앞에서 많은 이들이 “저 안에 어떤 삶이 담겨 있었을까”를 떠올린다. 주변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둔덕처럼 부드럽게 이어진 고분들 사이로 고즈넉한 기운이 감돈다. 한 여행자는 “아이에게 왕의 삶을 설명하려다가, 정작 내 삶을 돌아보게 됐다”고 고백했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여행 커뮤니티에서는 “낮에는 천마총과 석굴암, 저녁에는 경주월드 불빛 보는 코스로 주말이 꽉 찼다”는 후기가 이어진다. 또 다른 이용자는 “예전에는 경주가 옛날 도시 같았는데, 지금은 ‘천년 역사와 롤러코스터가 같이 있는 곳’으로 느껴진다”고 적었다. 그만큼 이 도시를 향한 인식이 ‘옛것 보러 가는 곳’에서 ‘나의 오늘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여행을 연구하는 이들은 “경주를 찾는 사람들은 이제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덧입히고 있다”고 말한다. 유적지 앞에서 남기는 사진에는 설명문보다 표정이 더 많고, 숲길을 걷는 영상에는 길게 이어진 텍스트 대신 짧은 음악과 발걸음 소리만 담겨 있다. 관광의 중심이 정보에서 감정, 지식에서 체험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흐름이다.

 

언젠가 수학여행 버스에서 졸며 지나쳤던 풍경이, 지금은 천천히 걷는 동행이 된다. 석굴암의 돌 하나, 천마총의 흙 한 줌, 경북천년숲정원의 나뭇잎 한 장, 경주월드의 공기 가르는 비명까지 모두 한 사람의 하루를 채우는 요소가 된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경주를 다시 찾는다는 건, 신라의 시간과 나의 오늘을 나란히 세워 보는 경험일지도 모른다. 결국 중요한 건, 어디를 가느냐보다 그 도시에서 어떻게 나답게 머무를 것인가일 것이다.

조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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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석굴암#경주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