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알고리즘이 흥행지형 바꾼다…웨이브, 저예산 영화로 시청시간 극대화
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과 시청 데이터 분석이 영화 흥행 공식을 바꾸고 있다. 극장 개봉 당시 관객 수가 10만 명에도 못 미친 중소 규모 작품들이 OTT 환경에서는 상위권 시청 시간을 기록하며 핵심 트래픽 유입원으로 부상했다. 대규모 마케팅과 스크린 장악력이 좌우하던 극장 흥행과 달리, OTT에서는 이용자의 체류시간과 클릭 패턴을 정교하게 포착하는 데이터 기반 큐레이션이 승부를 가르는 구조로 재편되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이 흐름이 향후 영화 투자와 배급, 플랫폼 편성 전략 전반을 바꾸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국내 OTT 웨이브가 12일 공개한 올해 톱 50 영화 집계 결과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극장 개봉 당시 관객 5만 명에 그친 백수아파트가 월정액 영화 상위권에 올랐다. 이 순위는 1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의 시청시간, 시청자 수, 검색량 등을 복합적으로 분석해 산출한 것으로, 극장 매출이 아닌 OTT 내 체류 데이터를 기준으로 한 순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웨이브는 세부 순위와 수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백수아파트 외에도 귀신경찰, 주차금지, 차라리 죽여,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원정빌라, 된장이 함께 톱 50에 들어 중소형 장르 영화의 약진을 보여줬다.

기술적으로 보면, 이러한 결과는 OTT 플랫폼이 보유한 사용자 행동 데이터와 추천 알고리즘이 결합해 만들어낸 전형적 사례다. 로그인 기반 서비스인 웨이브는 개별 이용자의 시청 이력, 일시정지 시점, 이탈률, 검색어, 선호 장르 등을 실시간으로 축적한다. 이 데이터는 머신러닝 기반 추천 엔진에 입력돼, 극장 성적이나 제작비 규모와 무관하게 이용자 개개인에게 맞춤형 콘텐츠를 제안하는 데 활용된다. 극장이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매출과 상영관 수에 의존하는 구조라면, OTT는 장기간에 걸친 반복 노출과 입소문 데이터를 통해 후반 흥행을 만들어내는 구조다.
이번에 두각을 나타낸 작품들의 공통점은 알고리즘이 잡아내기 쉬운 명확한 장르성과 직관적 후킹 포인트다. 생활 밀착형 스릴러 주차금지, 새벽 4시 층간소음 미스터리라는 콘셉트의 백수아파트, 가벼운 코미디로 포지셔닝된 귀신경찰, 킬링타임용 감성 드라마로 입소문을 탄 된장이는 모두 짧은 소개 문구만으로도 시청자가 내용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구조다. 복잡한 세계관과 대규모 캐릭터 군을 전제로 하는 블록버스터보다, 숏폼 콘텐츠에 익숙한 이용자에게 추천 화면에서 즉시 선택을 끌어내기 용이한 포맷이라는 점에서 OTT 적합성이 높다.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시청 패턴 변화는 이용자들의 저비용 고효율 소비 전략과 맞물린다. 이미 극장에서 대규모로 소비된 블록버스터보다는, OTT에서 처음 접하는 신선한 콘텐츠를 선택해 구독료 대비 체감 가치를 높이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분석이다. 특히 월정액 기반 서비스에서는 추가 결제 없이 볼 수 있는 영화 라이브러리 안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는 수요가 꾸준히 발생한다. 플랫폼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저비용으로 수급 가능한 중소형 영화가 높은 시청시간을 기록할 경우, 동일한 라이선스 비용 대비 수익성 지표가 좋아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극장 시장과의 비교에서는 디커플링 현상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올해 웨이브 톱 50 영화에서는 파묘, 암살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규모 극장 흥행작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박스오피스 순위와 OTT 시청 순위가 서로 다른 그래프를 그린다는 의미로, 동일 IP라도 유통 채널에 따라 수익 창출 곡선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스트리밍 플랫폼 중심으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글로벌 서비스에서는 특정 국가에서 개봉 당시 거의 주목받지 못한 독립 영화가, 타국 스트리밍 카탈로그 편입 후 입소문을 타고 뒤늦게 세계적 인기를 얻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이번 사례는 국내 영화계와 OTT 업계의 전략 변화와도 연결된다. 과거 OTT 플랫폼의 영화 수급 전략은 극장 흥행작을 독점 제공해 가입자를 모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반면 최근에는 트래픽 효율, 즉 콘텐츠 1편당 발생시키는 총 시청시간, 재시청률, 신규 구독 전환 기여도 등을 종합해 콘텐츠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분위기다. OTT 입장에서는 비싼 라이선스 비용이 드는 대작뿐 아니라, 적은 비용으로도 꾸준한 시청을 유도하는 가성비 콘텐츠 풀이 서비스 유지에 중요해지고 있다.
산업 구조 측면에서 중소 제작사와 저예산 영화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대대적인 마케팅 예산과 장기간 스크린 확보가 어려운 작품이라도, OTT에서 데이터 기반 추천과 장기 노출을 통해 뒤늦게 관객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재개발 아파트, 층간소음, 골목 주차 갈등 등 생활 밀착형 소재는 국내 이용자의 검색어와 대화형 시청 패턴과도 잘 맞아 떨어지면서 플랫폼 내에서 지속적 소비를 이끌어내고 있다. 허식 웨이브 영화 에디터가 숏폼 콘텐츠에 익숙한 시청자들이 직관적 흥미와 킬링타임 요소를 선호한다고 분석한 것도 이러한 데이터에 기반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 같은 디커플링이 모든 작품에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OTT 내에서 추천 리스트 상위에 노출되기 위해서는 플랫폼과의 협의, 편성 전략, 메인 화면 배치 등 또 다른 형태의 경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너무 많은 저비용 콘텐츠가 일시에 쏟아질 경우, 개별 작품의 발견 가능성이 오히려 낮아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추천 알고리즘의 설계 방향에 따라 일부 장르나 스타일이 과도하게 부각되고, 다른 유형의 작품이 구조적으로 불리해질 우려 역시 제기된다.
업계에서는 향후 영화계와 OTT 플랫폼이 극장 흥행 성적과는 별도로 스트리밍 성과를 독립적 수익 지표로 관리하고, 이를 전제로 한 투자·제작 모델을 마련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큰돈을 들여 흥행작을 독점 수급하는 것이 차별화 전략의 핵심이었지만, 이제는 얼마나 고효율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배치하느냐가 플랫폼 경쟁력의 관건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극장과 OTT 사이에서 흥행 그래프가 갈라지는 구조를 얼마나 전략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한국 영화 산업의 생태계와 디지털 플랫폼 시장의 판도도 함께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산업계는 데이터 기반 큐레이션이 만들어낸 이번 흐름이 실제 수익 구조 개선으로 이어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